2014년 2월 19일 수요일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요한복음 15:1~8)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
요한복음 15:1~8

우리 인생은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최고의 인격이며, 가치 있는 생활이라고 본다. 아버지께서는 홀로 영광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아들을 통하여서만 받으시는 것이다. 아무리 능력이 많고 풍부한 것이 있다 하여도 아버지 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영광이 될 수 없다. 세상에서 어떤 아버지가 훌륭한 보화를 품에 안고서 아들에게 주기가 아까워 만지고 있다가 끝을 맺고 만다면 아무런 영광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화를 아들에게 주어서 사회에 유익이 되는 일을 하도록 했다면 이것은 아버지께 큰 영광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 아버지는 농부요, 자기는 포도나무 그루터기요, 사명을 맡은 종은 가지라고 하셨고, 어떻게 되므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충만하게 열매를 맺게 하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일에 있어서는 오직 독생자 예수로 말미암아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 열매가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도 없고 영광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광을 받기 위한 목적에서 역사 하는 그 일은 다음과 같다.

1. 열매를 맺게 하려고 깨끗케 하시는 역사 (1-3)

인간이라는 것은 질적으로 타락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처음 열매로 가인이라는 악한 살인자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둘째 열매로 의로운 아벨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악의 열매가 의로운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담의 가정에 있었던 비극이다. 그 때부터 좋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자는 언제나 악한 열매를 맺는 사람에게 피해를 당하는 세상이 되었다. 언제나 악의 세력이 의의 열매를 없이 하려고 하는 인류 역사가 아담의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그대로 두고는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을 세상에서 할 수 없게 된 것이 말세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세에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은 더러운 인간들을 깨끗하게 만드는 법을 세우기 위한 희생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거룩한 신이라고 해서 더러운 인간들을 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더러운 인간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끗케 만드는 법을 세운 것이 속죄제를 받으시고 응답을 내리는 역사가 된다. 누구든지 깨끗해지기를 원하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무조건 깨끗케 만들어서 열매를 맺게 하시되 가장 깨끗한 진액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도록 하는 것을 기독교의 은혜 역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스스로 깨끗하게 살 수 있도록 낸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끗해진 자라야 마귀를 이길 수 있으며, 자기가 스스로 깨끗해지려고 결심했다는 것은 외식에 불과한 행동이 되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에는 타락한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깨끗해지는 것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조물주 하나님의 역사로 깨끗해지는 열매가 있는 것을 생명의 종교라는 것이다. 아무리 교회가 모든 일을 잘해 나간다 하여도 깨끗케 하는 역사를 받지 못했다면 아무런 열매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받는 일에 목적을 둔 것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이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에서만 열매를 맺게 하시는 역사 (4-6)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게 된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는 법을 세운 것을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삼으신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서 천국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인격으로 창조했다고 볼 수 있다.

아담이 너무나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아담과 같이 미약한 존재라면 기독교를 유지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오직 속죄제를 드리므로만 구원을 받은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다. 구약 때에 양을 잡아 드렸던 제사는 오실 메시야를 믿고 드린 것이며, 지금 우리가 드리고 있는 제사는 오신 메시야의 영원한 속죄제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역사 하시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그리스도의 의의 역사가 아니고는 아무런 것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 그리스도의 의의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야만 있다는 것이다.
셋째 : 인간의 어떤 행위로는 성신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신의 역사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로운 역사로만 우리에게 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무한한 성신을 아버지께 받으시고, 거룩한 피로써 우리를 사서 당신의 지체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우리에게 그리스도께 있는 성신의 역사가 오는 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다. 예를 든다면 포도나무 그루터기에 있는 진액이 가지로 오는 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요, 자동적으로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은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역사가 오므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은 독생자의 역사이므로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행함으로써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 자체가 악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독생자 그리스도의 대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역사를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의라고 본다.

3. 열매를 맺게 하려고 응답하시는 역사 (7-8)

오늘에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이냐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일에 있어서 사람이 해야 할 의무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이 있다 하여도 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줄 수가 없는 것이요, 구한다 하여도 그 말씀이 마음에 없는 자라면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구하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먼저 역사를 하시고자 하여 언약을 세우신 말씀을 의심없이 믿고 구할 때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기도 응답이라고 한다.

오늘의 기독교가 말씀을 혼선시키는 일이 있다면 가증한 예배가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노엽게 하는 기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을 혼선시키는 예배와 기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가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말에 하나님이 순종해 달라는 것과 같다. 이러한 사람의 행동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겠다는 마음보다도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자기에게 속해 있는 한 부분으로 여기는 일이 된다. 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든지, 자기 할 것을 다하고 그 남은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일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내가 나를 위하여 일하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이 더 크다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 라는 것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할 때에 응답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이 되는 것이다.

결 론

열매가 있으므로 아버지께 영광이요, 열매가 없으므로 아버지께 슬픔이 된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많은 열매를 맺어서 복을 받으라는 것이 소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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