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0세기 공산주의 대학살 연대기(年代記) (2)
written by. 김필재
反美·反戰-간첩과 부패로 패망한 베트남
자유베트남은 시종일관 反美·反戰 데모를 주도했던 간첩과 시민·종교단체의 조직적인 선전선동결과 미군의 전면철수 후 공산화 됐다. 베트남은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맹을 훨씬 앞질렀지만 부패했고, 휴전협정 이전부터 사회 곳곳에 침투한 간첩과 시민·종교단체들은 부패척결과 反美·反戰 평화를 명분으로 베트남의 신경망을 장악해갔다.
197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전면 철수 하자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베트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직업적 좌경인사, 反戰운동, 인도주의 운동 등 가능한 모든 운동체가 총동원되어 티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1975년 베트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당했던 것이다.
5만여 명의 간첩, 민족주의자·평화주의자로 위장
이들은 호치민이 1930년 2 월에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인 웬후토가 1962년 1월에 창당 한 인민혁명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다. 패망 당시 베트남에는 공산당원 9500 명,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5만여 명의 월맹간첩들은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한 채 시민·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핵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미군의 전면철수 후 베트남패망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간 이후에나 확인됐다. 1967년 치러진 베트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야당지도자 쭝딘쥬도 대표적 간첩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냐"며 월맹에 대한 포용정책을 주동했다.
간첩들이 가장 많이 침투했던 것은 시민·종교단체의 부패척결운동과 反美·反戰평화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선전선동을 통해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해가면서,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자유베트남 정부 협조한 사람들 모두 재교육 받아
베트남은 공산화 이후 지식인, 공무원, 군인, 종교인, 부유층, 그리고 월남정부에 협조한 사람들은 전부 재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적대(敵對)계층으로 분류됏으며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로 간주되어 승자의 보복대상이 됐다. 탄압과 차별, 학대와 폭정이 자행되었고 전국 각처에 재교육 수용소가 설치되어 적대계층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잡아 가두고 공안경찰을 증원(增員)하여 국민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고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것을 통제했다.
특히 가혹한 육체노동을 강요했다. 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규정하여 "부모의 흘린 피와 땀, 자식이 흘린 피와 땀이 합쳐야 나라가 번영한다"고 선전하면서 무자비(無慈悲)한 노동을 강요했다. 논과 밭은 국유화되고 영농은 철저한 3모작을, 일반 국민은 헌금을 강요받았으며 돈이 없는 자는 노력봉사를 해야만 했다. 노동자는 한달에 15kg의 쌀을 배급받아 생활해야 했고, 전쟁부채 상환비, 전비(戰費)기금을 내야 했다.
공무원·경찰·정보요원을 제국주의 앞잡이·도구
먹는 것을 철저히 통제하고 수중에 돈이 없게 하여 국민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철저한 국민재교육을 시행했다. 또한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종래 부를 축척한 모든 것을 부정해 자살을 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 국민 재교육은 "공무원(公務員)은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경찰(警察) 및 정보요원은 제국주의의 도구(道具)로, 군인(軍人)은 무력으로 총을 가지고 대항했던 사람으로, 문예(文藝)인은 민족정신을 교란시킨 사람으로, 종교인(宗敎人)은 국민을 유혹하여 미신에 빠지게 하고 우매하게 만든 사람으로, 자본가(資本家)는 국민을 착취하여 강압적 노동을 시켜서 반혁명에 앞장을 섰으며 국민에게 피의 부채를 지고 있다"는 죄를 물어 재교육을 시켰다.
"우리 공산당은 이 반역자들을 재교육 과정을 통해서 사회주의 혁명에 동참할 선량한 국민으로 개조하고, 사회에 필요한 사람으로 선도할 것이며 노동을 경험하게 하여 자력갱생(自力更生)의 길을 열어준다."라고 선전했다. 한 수용소에 2.000명 정도 수용했으며 성(省) 별로 1개 이상이 있고 사이공 주변 등 도시 주변에는 대상자가 많음으로 여러 곳에 설치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밀림지대에 위치시켜 탈출을 방지하고, 나무를 벌목하여 수용소를 짓고 개간하면서 식량은 월 9kg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자급자족하도록 했다.
즉결처분 인원 포함 최소 30~200만명 사망
수용소 방침 자체가 체형(體刑) 및 학대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작업 실적에 따라서 수용소장의 재량으로 급식의 양을 결정했다. 따라서 제거해 버리고 싶은 적대계층의 사람은 굳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더라도 제거할 수 있게 제도를 만들었다. 가족이나 다른 국민들, 외국(外國)의 항의를 벗어나기 위한 교묘한 방법을 강구해 냈다. 수용소 기간에는 면회가 일체 사절되었고, 편지도 1년 또는 2년에 한번 보낼 수 있었으며 의료혜택은 전무하여 병에 걸리면 바로 죽는 것이었다.
말라리아 등의 열병과 뱀 전갈의 독충과 영양실조 및 미래에 대한 포기는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혁명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제거했다. 즉결처분된 사람들을 포함하여 그 인원은 30만에서 2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확한 통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월남 군인만 100만이 넘는 것을 감안할 때, 하사관 및 초급장교까지 수용소로 보냈으며 공무원 종교인 경제인 월남 정부 협조자와 그 가족까지를 포함하면 최소한 100만 명 이상의 상당한 숫자가 재교육을 받았다고 판단된다.
한편 공산치하에서 살기를 거부한 수많은 남부 베트남인들은 즉각 해외로의 탈출을 시도했다.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 망명길에 올랐던 1세대 탈출자들은 미국 등 서방으로 이주하여 비교적 쉽게 그곳에서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6년부터 탈출한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은 안전한 이주 및 재정착의 보장없이 무작정 국경을 넘거나, 배를 타고 공산베트남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1976~1992년말까지 총 792,893명 베트남 탈출
이들중 상당수는 다른 나라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고, 동남아 일대의 바다를 정처없이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들이 바로 보트피플(Boat People)이라 불리우는 베트남 난민이다. 1976년부터 1992년말까지 동남아지역으로 탈출한 사람들의 수는 총 792,893명에 이르렀다. 1979년부터 1992년말까지 동남아국가들의 난민 수용소(refugee camp)를 거쳐 최종적으로 난민자격(refugee status)을 인정받아 서방 등 제3국에 정착한 난민수는 438,436명으로 나타나고 있다.(konas)
김필재 (코나스 객원기자)
2005-09-13 오후 6:13:1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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