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을 예배할 때가 이름
요한복음 4:1~26
인생이라는 것은 예배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가 흘러오는 동안에 참으로 아는 것을 예배한 자는 큰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할 적에 오히려 죄가 되는 것이요, 아는 것을 예배할 적에 의를 이루는 동시에 최고의 가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 타락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인격을 상실하고 보니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을 수가 없게 된 이유는 인간들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치 않고 자기 마음대로 예배할 때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마귀를 숭배하는 우상적인 종교가 되고만 것이다.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야곱의 열 두 지파라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치 않고 예배할 때 북방 사마리아라는 나라가 생겼던 것이다.
이것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므로 복을 받았지만 이방의 여신을 용납했다는 죄로서 결국은 알지 못하는 예배를 드리는 부패가 생겼던 것이다. 북방 사마리아가 남방 예루살렘과 원수가 된 것은 열두 지파 중 열 지파가 남방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가지 못하도록 담을 막고 그리심산에 신당을 짓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예배할 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떠나가고 우상적인 종교를 이룬 사마리아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종말에도 소위 기독교 교인이라 하면서 예배를 방해하고 자기의 주권적인 운동을 해보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바로 알고 그 진리에 따라서 예배해야만 될 것이다. 이제 아는 것을 예배하는 자는 어떠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1. 예배를 받는 자의 심정을 알아야 한다 (1~20)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예루살렘 성전을 들어가 볼 때에, 노하여 강도의 굴혈을 짓지 말라고 하면서 모조리 채찍으로 때려서 내몰았던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서 생수를 받으라고 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 여자가 남편이 많다 하여도 그 여자를 더럽다 하지 않고, 나는 메시야라고 하면서 지금은 아는 것을 예배할 때가 온다고 했던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더러운 죄인으로 볼 수 있는 여자 하나를 앞에 놓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생수를 받으라고 하는 심정, 나는 메시야라고 하는 심정,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어떠하다고 말씀하신 그 심정은 아무런 죄인이라도 아는 것을 예배할 때가 왔으니 너는 나를 누구인 줄 바로 알고 예배하라는 말씀이다.
예루살렘 거리에서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거룩한 거리에 거룩한 의복을 입고 왕래하던 무리들이 예배하던 성전은 황무지가 되었고 유대인이 볼 때 짐승같이 여기는 죄인들은 바로 알게 되어 성전을 짓고 예배하는 일이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배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자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게 된다.
2. 시대를 따르는 예배 (21~22)
언제나 하나님은 시대를 따라 법을 세우고 법을 따라 예배를 드릴 때에 예배를 받으시고 축복하시는 것이다.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는 아담의 집에서부터 양을 잡아 드리는 피의 제사로 하나님을 공경하되, 양심으로 공경했다(딤후1:3). 이 양심이라는 것은 오실 메시야를 기대하는 양심에서 어린 양을 제물로 드릴 때에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시대가 이루어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으므로 어느 민족이나 다 같이 예배할 수 있는 비밀을 모르고 예배를 방해하던 유대인들은 다 망하고 십자가의 도를 바로 아는 자들이 예배할 때에 성령은 강하게 역사하므로 기독교는 온 세계 인류를 구원하는 대 종교를 이룬 것이다.
3. 신령과 진리의 예배 (23~24)
과거에는 모든 일을 몽학적인 교훈으로 예배 의식을 하나님이 주셨지만,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이 되는 역사가 있을 때는 몽학적 교훈의 의식이 필요 없고 직접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통하는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때와 성령이 역사할 때의 예배는 다르다. 지금 만일 어떤 교회가 성령의 역사 없이 예배 의식만 지킨다면 이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 예배가 된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는 예배를 볼 때마다 성령의 역사가 은사로 내렸던 것이다.
지금은 예배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분명히 알고 예배하는 자라면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하므로 은사의 체험을 받는 신령한 세계에서 그 영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같이 새로워지는 열매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예배를 인도하는 자는 십자가 중심에서 날마다 십자가의 고난을 참고 나가는 승리의 생활이 있으므로만 마귀의 흑암을 이기는 예배가 될 것이다.
결 론
가장 복 있는 자는 지금 이때에 아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금일에 예배하는 자가 많이 있지만 사랑을 떠난 교회에는 도저히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으므로 그 예배는 아무런 응답이 없게 될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나타나서 구원을 완성했으니 이제는 여러 가지 의식이나 제물이 필요 없고 구원을 완성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녹아져서 그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할 때에 적은 무리가 모여도 신령한 예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 그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적에 사랑의 은사를 체험하고 사랑의 진리를 가지고 사랑이 넘치는 생활에서, 입으로 찬송하고, 입으로 기도하고, 입으로 증거할 때에 기도나 찬송이나 설교는 다 열매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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