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예레미야 12장
제목 : 재앙 받기를 자초(自招)하는 교회
1. 선지자의 호소와 하나님의 답 : 1~6
『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
"쟁변"이란 투쟁적인 변론을 의미한다.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한 것은 역설체(力說體)이다. 예레미야가 이 점을 역설한 이유는 그가 비록 이후로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의문을 갖기도 하겠지만 "주님의 공의"을 믿는 그의 신앙만큼은 의심이 없다는 것이다.
욥기 9:3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이 질문은 시편 73:2~16절에도 기록돼 있다. 이 세상에서는 형통하는 악인들이 더 우세한 듯 산다. 하지만 그들은 반드시 멸망당할 때가 있는 반면,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재앙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해 주시므로 필경 하나님을 영원한 분깃으로 모시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약속해 준다(시편 73:18~28, 17:14~15).
『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형통하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되어지는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합 1장). 이들의 형통함이 부러울 것이 없는 것은 그들의 분깃은 '이 세상 것'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그들의 인생 또한 참 성도들의 영적 승리를 도와주는 보조자 역할(악역)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사야 10:5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하셨으니 야곱을 위하여 에서가 존재하고 아벨을 위하여 가인이 존재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가룟 유다가 존재하며 예레미야를 위하여 하나냐가 존재하는 것이다. 종말에도 스룹바벨 단체를 위하여 666 바벨이 존재한다. 144,000명의 종의 수만 차면 잠시 쓰시던 악을 제하시고, 버터와 꿀이 넘치는 새 시대 천년왕국을 이루신다고 주님 친히 약속하셨다(이사야 7:15).
『 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예비하옵소서 』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이 말씀은 예레미야가 자기에게 맡겨지는 선지 직분을 완수했다는 뜻이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만큼 절실한 사명감을 가지고 예언했는가를 보여준다. 이렇게 선지자가 할 일을 다하였으니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끝까지 반역하던 유대인에게 대하여는 이제 멸망이 선포될 뿐이다. 선지자의 예언이란 듣는 자들이 회개치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예언이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절대 작정을 대언(代言)하는 자이니만큼 백성이 그의 말을 무시하여 거절할 때에는 심히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거짓 선지자도, 참 선지자도 다 하나님이 쓰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거짓 선지자까지 내어보내심은 이 백성이 진실로 여호와를 믿는 것인지, 믿는 시늉만 하는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함이라 하셨다(신명기 13:1~5. 예레미야 23:15~32).
『 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거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무수한 "채소"와 "짐승들"까지도 다 "멸절"되야 하는가에 대해 하나님께 애탄하며 질문하고 있다. 하나님은 스바냐서에 확실히 답해 놓으셨다. 자연계의 재앙도 인간의 죄값이라는 것이다(스바냐 1:2~6).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악인들의 심히 악하고 무지한 말이다. 이 말에는 첫째, 예언자들이 떠들어 대던 소리가 맞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비아냥거림의 뜻이 담겨 있다. 둘째로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은 감찰하지 않으신다는 실로 무신론적인 신앙이 담긴 말이다. 이방 무신론 공산당 같은 자들이야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본문 예언은 하나님의 성전 안에 저러한 말을 지껄이는 자들이 많다는 뜻이다. '교회 안에' 말이다!
시편 10:3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鑑察)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교회 안에 악인이 있다.
『 5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 하겠느냐 』
예레미야가 예언사역을 하는 중 고향 사람들로부터 받는 핍박의 괴로움을 하나님께 고할 때 임한 말씀이다. 앞으로 보다 더 큰 고통이 임할 것인데, 현재의 고통 정도로 피곤하다면 어찌 버티어낼 수 있겠느냐는 질문형식의 권고 말씀이다. 예레미야가 그 고향 아나돗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것은 아주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배신당했을 대의 느낌과 같은 것이었으니, 실로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당할 더 큰 환난에 비할 때 "평안한 땅에서 무사히 지내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시다. 앞으로 "요단의 창일함"과 같은 일이 있을 것이라 하신다. 이는 요단강의 넘치는 수재(水災)를 의미한 것으로, 이제 북방 바벨론 군대가 홍수물이 넘치듯 밀려내려오므로 당할 고통에 비하면 지금 당하는 고난은 '새 발의 피'(鳥足之血)라는 것이다(다니엘 11:40~45).
다시 예언하고 있는 말세의 종들이여! 우리가 현재 전도 중에 당하는 '혀가 마를 딱한 사정'은 앞으로 이 나라에 북방 공산당이 내려와서 안겨줄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자.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니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의지하지도 말자. 우리는 하나님만 의뢰하여 더욱 담대히 나아갈 것뿐이다. 시편 118:5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내게 어찌할꼬 7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아멘!
『 6 네 형제와 아비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
예레미야가 현재 당하는 고난은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정도이지만 앞으로는 "형제와 아비의 집"에서까지 배척당할 것이라 하신다. 이런 환난은 강한 종으로 빚어내어 확실하게 쓰시기 위한 연단이라고 본다(이사야 48:10~, 29:1~4). 이사야 50: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강인한 인격으로 만들어야만 수치를 이기고 나아가 사명을 완수할 수 있으므로 주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고난의 풀무에 집어넣어(이사야 48:10) 금강석같이 만드신다(겔3:8~9).
"그들이 너를 속이며...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참 종의 주변에는 인정(人精)으로 다가와 믿게 한 후 쓰러뜨리는 마귀의 배신행위가 진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참 종이 마귀가 쓰는 그 인정(人情)을 받아주지 않을 때, 그 종의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는 것이다(마태복음 10:34~39). 미가 선지자도 이르기를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하였고(미가서 7:5), 다윗도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기도하였으니(시편 141:3), 참 종의 갈 길은 인간의 잔정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만 교통해야 하는 고독한 길이다.
창세기 22장의 모리아산의 제사를 추억해 보자. 아브라함은 천하만민을 살리게 될 큰 제사를 행함에 있어 입술의 문을 굳게 지켰다. 동행한 두 사환에게 의로운 거짓말을 하여 먼 곳에 머물게 함으로써 제사의 방해를 받지 않았으며(22:5), 또한 뭔가를 눈치챈 듯 두려워하며 질문하는 아들의 물음에도 우회적으로 답변하여 '입술의 문'을 지키었다. 하늘이 준 지혜이다(22:7~8). 미리 알려주었다면 사단은 이삭에게 순종심보다는 공포심을 주었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빠른 달음질로 도망하여 자기를 죽이려는 하는 아비의 집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출발 전날 밤, 품에 누운 여인과 의논하지 않은 아브라함의 입술은 최고로 귀한 입술이다! 만일 사라를 존중히 여겨 그녀와 의논하였다면 사단은 사라 속에 들어가 나이 90에 얻은 귀한 독자를 잡아 죽이려는 남편을 '미친 영감'으로 매도하며 이삭을 구해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녀'로 주신 자식을 죽이려는 남편을 마귀들린 자로 몰아세웠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라뿐 아니라 그 집의 모든 종들까지 아브라함이 귀신들린 줄 알고 차후로 심히 경계했을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종들이나, 아들에게나, 그 품에 누운 여인 사라 중 누구 하나에게라도 '입술의 문'을 열었더라면 모리아산 제사는 마귀의 훼방으로 망쳐졌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려는 마귀의 참소는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것이니 참 종은 하나님의 뜻을 가슴에 묻어둔 채 조용히 실천에 옮겨야 할 뿐이다. 이 인격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은 오늘도 종들을 단련시키고 계신다(이사야 29:1~8).
사명이 큰 종과 그 가정, 그리고 그 교회 안에는 마귀의 참소가 극도로 강한 법이다. 고로 하나님은 당신의일이 완성되기까지 참 종의 입술을 굳게 지켜 주신다. 사람이 힘세고 고집있는 소를 부릴 때 그 코를 꿰어 부리는 것처럼, 하나님도 어디로 빗나갈 지 모르는 패역한 인간들을 쓰실 때에 그 코를 꿰어 꼼작 못하게 하신 후 쓰신다. 도망가던 요나는 코가 꿰어 잡혀온 대표적 경우이고, 모든 선지자들도 다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은 순하게 말씀을 좇아간 대표적인 모범 케이스이나 그의 '입술 문'을 지켜주신 분은 여호와시다. 선지자의 길은 마귀에게 얻어터지고 마귀불에 그슬리는 고난의 길이므로 하나님이 붙잡아주시지 않으면 인간으로서는 다 도망가고 마는 법이다. 지금 예레미야도 극도의 고통 중에 있으나 하나님은 그의 코를 꿰고 그의 입술을 지키시며 당신의 일을 완성해가고 계신다.
2. 산업 황폐를 슬퍼함 : 7~13
『 7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산업을 내어던져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을 그 대적의 손에 붙였노니 』
"내 산업, 내 집, 내 마음에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과 유대인을 의미하는데, 종말적으로는 '피로 사신 세계의 영적 이스라엘'을 뜻한다. 지금도 세계교회가 구약 때와 같이 "하나님의 성전이 여기 있으니 누가 감히 우리를 침략하랴"(예레미야 7:4) 라는 안일함을 보이고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심판 받았으니 교회에는 더 이상 심판이 없다는 주장이다(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자범죄를 씻기 위한 죽음이다. 원죄 즉 육체 심판 문제는 보혈로 사신 책을 통해 해결받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뼛골 속 원죄까지 다 씻으셨다면 현재 우리 육체가 늙고 병들어 흙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창세기 3:19). 이 '사망선고'는 초림주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요, 그분이 친히 재림할 때 해결하실 문제이다(이사야 25:6~8. 스가랴 3:9). 이 때 쓰이는 법은 당신의 '피로 산 말씀'이다. 종말의 환난이란 '영혼구원' 받은 교회의 불법을 심판하는 일이므로(육체심판), 이 심판을 피하는 길은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그 믿음 위에 그분의 피로 산 예언서의 법까지 순종하는 것뿐이다). ☞ 하나님의 시대적인 7대법
하나님께서는 종교적 외형만 붙잡고 그 권위와 위엄 아래 피신하는 자들을 제일로 미워하신다. 이들은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난 자들인데, 계시록 11:1~12절같이 성전 안에 있는 자들을 척량할 때 성전 밖 마당이 되어 이방인(북방)의 칼에 붙여질 자들이다. 마태복음 23:23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메시야께서도 외식자들을 정죄하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만왕의 왕의 재림 주 앞에 서야 할 종말의 외식자들 역시 정죄당할 것은 뻔하다. 종말의 외식자들은 누구일까? 교회에 다닌다면서도 예수님이 재림주 형상으로 사도요한에게 나타나시어 하신 말씀을 따르지 않는 모든 자들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나의 내 피로 산 교회들이여(사도행전 20:28), 너희는 이 예언의 말씀을 꿀같이 먹고 내가 다시 올 때에 전 세계에 다시 예언하라"(계시록 10:7~11). 이 말씀을 잊고 살면서도, 그 받은 '영혼구원'에 만족하며(안주하며) 다시 예언하는 자들을 훼방하는 이들은 모두 종말의 외식자들이다. 주님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멸시하던 자들은 결국 재림하시는 주님께 심한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마태복음 24:45~51).
『 8 내 산업이 삼림 중의 사자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발하는 고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로라 』
"내 산업"이란 유다 민족을 의미한다. 그러나 종말인 현재에는 이 땅의 교회들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불신앙을 고집하며 그 말씀을 지키지 않기는 매한가지이다. 특히 '다시 예언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새 일(예레미야 31:22)을 애써 이단시하고 있는 모습은 하나님께 대한 마지막 대항이라고 볼 수 있다. "삼림 중의 사자 같다"고 하심은 선민이 하나님께 으르렁대며 대드는 모습을 비유하신 것이다. 예언을 불신앙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함이니 이를 싸우려고 달려드는 사자의 모습에 비유하신 것이다. 인생은 그 창조된 목적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는 것인데, 인생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자신을 더 신뢰하며 세상의 무수한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이다. 우상제일주의는 사단에게 속한 사상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배척하는 말로 형용치 못할 배은망덕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하심과는 정반대로 행하며 하늘에 대해 투쟁적으로 움직인다. 20세기에 들어 '하나님이 없다' 하는 무신론 유물사관의 무리가 등장해 북방에 자리를 잡고 핵강대국이 된 것도 모두가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다. 이들이 나타난 것은 '사자같이 사납게 제 주인을 향하여 으르렁거리는 망령된 교회'를 잡아먹기 위해서이다. 이 적기독의 무리는 성경의 '짐승'으로서 타락한 교회를 심판하고 잠시 세상을 차지하였다가(후 3년 반) '아마겟돈'에서 멸망할 세력이다.
『 9 내 산업이 내게 대하여는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매들이 그를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 』
유대교회가 "무늬 있는 매"와 같다 하신다. 무늬 있는 매란 얼룩진 육식조(肉食鳥)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비둘기 같은 순한 새가 아니고 매우 사나운 새이다. 교회를 사나운 육식조(六識鳥)에 비유한 것은 선민이 하나님을 떠나 육식조와 같은 이방인의 마음을 본받으며 이방인의 풍속에 자신을 물들였음을 의미한다. "매들이 그를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이것은 이방 모든 나라들이 위에서 말한 바 "무늬 있는 매"와 같은 유대교회를 침략하리라는 말씀이다. 유다 나라는 예쁘게 꾸미고서 이방과 타협·협상하므로 덕을 볼 줄 알았으나(평화공존) 도리어 주 앞에 심판 받을 행위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계시록 17장). 종말에도 은혜를 크게 받고서도 이와 동일한 노선을 가고 있는 "무늬 있는 매"가 등장했다(W.C.C., K.N.C.C. / 사명국가 대한민국의 협상정치). 이 예언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북방 칼에 무참히 죽어나가고 말 것이다.
지금의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의 예언을 버리고 사단의 거짓 평화공존을 따라가고 있는 현실이므로, <다시 예언하는 단체>가 없다면 쑥물을 먹고 죽어가는 양 떼를 살려낼 도리가 없다(새일성가 57장 3절).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길은 '하나님의 시온깃발'을 높이 들고 다시 예언하는 길뿐이다(새일성가 37장 2절). 상황이 예언대로 흘러갈 줄 미리 아시고 주님은 초막절(레위기 23:34~44) 역사를 위하여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신 것이다(계시록 10:11).
이사야 56:9~10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오늘날의 교회 지도자들은 '벙어리 개'가 되어버린 현실이다. 고로 들의 짐승 곧 북방 공산당이 하나님의 몽둥이가 되어 내려온다는 것이다. 예레미야 당시에는 유다가 북방 바벨론으로부터 세 차례의 침략을 당하므로 이 예언이 성취됐고, 예수님 당시에는 AD 70년에 로마 제국이 유대교회를 멸망시키므로 성취되었으며(마태복음 23:37~39),
종말에는 소련이 후 3년 반 동안 세계 교회의 쭉정이를 다 멸함으로써(계시록 13장) 이 예언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다시 예언하라 함의 귀중성을 알겠는가? 우리가 살고 죽는 길이 구약책에 기록돼 있다. 고로 이 시대의 살 길은 '평화공존'이 아니라 '다시 예언' 뿐이다(계시록 10:7~11).
『 10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훼파하며 내 분깃을 유린하여 나의 낙토로 황무지를 만들었도다 』
"많은 목자"란 이방 나라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유대교회가 하나님을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잔인무도한 이방 나라의 폭군들에게 유대백성을 버리신 것이다. 여호와만이 유다의 목자이신데, 이제 목자가 바뀐 것이다. "내 포도원, 내 분깃, 나의 낙토"라는 세 가지 말이 나오는데, 아무리 아름다운 하나님의 소유라 하더라도 회개치 않고 끝까지 불순종하면 여지없이 버린다는 교훈이다. 홍해를 가르시고, 만나를 내리시고, 반석을 터뜨려 물을 내주시면서까지 살려내신 당신의 귀한 이스라엘이었다. 여러 가지 이적으로 가나안 강대 족속들을 멸해 주시고, 이스라엘에로 승리케 하신 하나님이셨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소산을 내려 주시고, 당신이 거하실 성전건축을 허락하시어 영광으로 충만케 하시고 제사를 받아주시던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백성은 배은망덕하고 우상을 따라갔다. 자기 패역을 좇아 각기 제 길로 치우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패역을 참으시며 때마다 심판치는 아니하셨다. 길이 길이 참으사 선지자를 보내시며 훈계하셨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비의 마음으로 말이다. 백성이 선지자를 죽이면 또 보내시고, 가두고 내쫓아도 다시 일으켜 내보내셨다. 당신이 백성에게 매맞고 쫓겨나시면서 그들의 살 길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한없는 은혜로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치 않고 불순종할 때 눈물을 흘리시며 북방 몽둥이를 내려보내 심판하셨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서 '이방의 개'였던 우리의 패역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값없이 거저 얻은 은혜로 '피로 산 백성'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나 선지자들이 맞아죽어가며 기록한 '생명의 경고'가 다시 예언되는 오늘날, 이 예언을 또 다시 무시한다면 아무리 피로 산 17억의 영적 선민이라 할지라도 구약 선민보다 더 나은 대우를 기대할 수 없다. 종말의 심판은 구약보다 훨씬 더 준엄할 것이다. 악마는 득세하고(하박국 1장, 계시록 9장), 교만의 북방 몽둥이는 주의 손 안에 높이 들려져 있기 때문이다(이사야 10:5~19).
『 11 그들이 이를 황무케 하였으므로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온 땅이 황무함은 이를 개의하는 자가 없음이로다 12 훼멸하는 자들이 광야 모든 자산 위에 이르렀고 여호와의 칼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키니 무릇 혈육 있는 자가 평안치 못하도다 』
본 구절은 유대가 북방 칼에 의해 얼마나 비참하게 유린당할 것인가를 묘사해 준다. "황무"란 말이 3번이나 나오고, "훼멸", "여호와의 칼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킴", "평안치 못함" 등의 비참한 표현들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구약 유다의 형편은 종말의 협상주의 교회가 처할 형편이기도 하다. 모든 예언은 종말의 거울임을 한 시(時)라도 잊지 말라! (히브리서 10:1~1. 고린도전서 10:6,11. 로마서 15:4. 이사야 46:10~).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자연계도 인간의 죄 때문에 재앙을 받는다(창세기 3:17. 로마서 8:19~22).
"이를 개의하는 자가 없음이로다" 예레미야에 대한 아나돗 사람들의 죄악은 하나님께 대한 유다 전체의 죄악과 같다. 죄악으로 인해 환난 앞에 직면하여서도 완고하여 회개치 못하므로 예비된 심판이 결국 시행되리라는 뜻이다.
『 13 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그 소산으로 인하여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를 인함이니라 』
"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불순종한 백성들에게 받을 재앙은 노력하고 기대한 것에 비해 형편없는 소산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 떠난 모든 노력은 헛수고가 됨을 뜻한다. 사명자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을 때 하나님은 노력해도 허사가 되는 재앙을 내리신다(학개서 1:9~11).
3. 포로민에 대한 예언과 회복의 약속 : 14~17
『 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산업으로 준 산업을 다치는 나의 모든 악한 이웃에게 대하여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버리겠고 유다 집은 그들 중에서 뽑아 내리라 15 내가 그들을 뽑아낸 후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긍휼히 여겨서 각 사람을 그 산업으로, 각 사람을 그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16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사는 여호와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중에 세움을 입으려니와 17 그들이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본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택민을 위하여 막대기로 사용한 북방 바벨론을 70년이 찰 때 징벌할 것임(예레미야 25:12).
택민은 죄값을 치르고 반드시 돌아올 것임(역대하 36:21~23. 에스라 1:1~11).
택민이 돌아올 때 이방인들도 함께 하여 야곱의 도(이사야 2:3)를 부지런히 배우며, 바알 신을 섬기던 열심으로 참 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새 땅 백성으로 가입될 것임(계시록 7:9~15).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기준을 세우시고 기준에 합당한 선택을 행하신다. 먼저는 '율법'을 세우시고 율법으로 당신 백성을 택하셨고, 그 후에는 '십자가'를 세우시고 은혜로 다시 뽑아 택하셨으며(사도행전 13:48), 이제 마지막 환난시대에는 '기호'를 세우시고 변화성도로 택한 자 144,000명(계시록 7:2~8)과 그들의 전도를 받고 백성으로 택함 받아 환난을 면코 새 시대에 들어갈 흰무리(계시록 7:9~17)를 끌어내신다. 성경의 커다란 줄거리는 이렇다. 당신의 선하신 선택과 모략을 통해 구약역사를 주관하시며 예언이 기록되게 하신 다음, 그 예언을 다시 피로 산 백성에게 그대로 적용되도록 역사를 운행하시어 당신의 메시야 왕국을 이루어내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그의 결정함에 결코 후회가 따르지 않는 절대적인 선택과 유기를 행하시므로 피조물 된 자로서는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에베소서 3:18~19). 다만 시대마다 주시는 말씀에 어린아이와 같이 순종하므로 '입법자'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얻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백성된 자로서의 최고 지혜일 것이다.
순종보다 나은 제사는 없다(사무엘상 15:22).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하시되 각처에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순종의 깨끗한 제물을 드리는 자들로서 백성을 삼겠다 하셨다(말라기 1:11). 겸손한 자는 예언서를 붙잡고 순종으로 나아가 하늘과 땅의 축복을 차지하지만, 교만한 자는 세상 죄악의 물에 빠져 썩음을 당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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