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한 자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역사
사도행전 8:26~40
사도행전 8: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31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역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찾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한 종을 쓰시는 것은 택한 자를 찾기 위하여 쓰는 것 뿐이니 택한 종은 겸손히 순종할 것 뿐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기 위하여 택한 종을 들어 쓰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종은 겸손히 그의 역사에 순종할 것 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자기의 어떤 방법으로 일한다는 것은 그 근본적인 사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 그 날 일하는 것을 절대로 순종해 나간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아무런 것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겸손히 순종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역사는 다음과 같다.
1. 천사의 인도를 받게 됨 (26-27)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나타나서 이르기를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조건 순종의 걸음을 걸어가는 빌립은 큰 열매를 맺게 되었다. 언제나 하나님의 종이 순종하는 길을 갈 때에는 인간이 볼 때에 어리석은 일 같으나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찾기 위하여 역사 하시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방 고넬료의 가정에 전도할 때에도 천사의 인도를 받았고, 바울이 아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갈 때에도 천사의 인도를 받았던 것이다. 크나큰 열매는 베드로가 가이사랴를 향하여 가는 길에서부터 있었고, 구라파를 통하여 세계를 움직이는 운동도 바울이 순종의 걸음을 걷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는 순종의 걸음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축복을 가져오는 열매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택한 종 하나가 순종하는 걸음은 얼마나 귀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도 앞으로 주의 천사의 인도를 따라가는 길에서 큰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2. 성경을 바로 깨닫게 됨 (28-35)
택한 자는 성경을 읽기 좋아하는 동시에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일 국의 큰 국고를 맡은 내시가 길을 가면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성신의 인도로 말미암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이사야 53장을 읽게 되었다. 언제나 택함을 입은 사람이 성경의 뜻을 모르고도 은혜롭게 읽게 되는 것은 자기의 어떤 흥분이나 감정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에게 그 성경을 바로 깨닫도록 하는 것은 택한 종을 들어서 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천사의 방언을 할지라도 택함을 입지 못한 자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로되 택함을 입은 자는 성경 본문을 읽는데서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는 마음이 불타므로 택한 종을 통하여 간단히 말하여도 깊이 깨달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인간의 학설이 필요가 없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에게 성경대로 담대히 증거할 것 뿐이다.
언제나 성신의 역사라는 것은 성경 본문을 간절한 마음으로 읽게 하는 동시에 그 성경 본문을 깨닫게 하되 선각자를 들어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아는 것은 각자가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니요, 겸손히 성경을 읽는데서 참된 종을 통하여 알게 하는 것이 성신의 역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선각자를 무시하고 자기가 스스로 성경을 알아보려고 한다면 교만한 일이라고 본다.
3. 세례의 축복을 받게 됨 (36-40)
오늘에 교회가 세례의 큰 축복을 등한시하는 일이 있다고 본다. 언제나 세례는 성신의 역사 아래서 성신의 인도를 받아 물 속에 잠겨 올라 올 때에 큰 축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가 이 법을 시행치 않는다는 것은 세례의 축복을 받지 못할 과오가 되는 일이다. 우리는 택한 자의 몸이 성신의 역사로 물에 잠겨 올라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저주받았던 사망의 몸은 물에 아주 장례가 되고 축복을 받을 몸으로 물에서 올라오는 것이 세례의 축복이다.
내시가 물에 잠겨 올라 올 때에 주의 성령이 빌립을 인도한 것을 본다면 얼마나 귀중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물에 잠겨 올라 올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한 사실을 보아도 얼마나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물을 통과시키는 것은 큰 축복을 그 몸에 주기 위한 일이다.
결 론
택함을 입은 자가 하나님의 택한 종을 만나게 되는 일이나 하나님의 택한 종이 택함을 입은 자를 찾아서 만나게 되는 일은 너무나 귀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택한 자를 찾기 위하여 택한 종을 들어 쓰는 주님의 역사이므로 여기에는 조금도 인간의 방법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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