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일 금요일

[동영상] 스룹바벨 선교회 20190201_D_예레미야37장~38장 말씀

[금 새벽 설교] 예레미야 37장~38장 : 예레미야의 투옥 / 예레미야의 재차 투정과 구출 2019/02/01 Friday Dawn

2016년 2월 18일

Mahershalalhashbaz (Isaiah 8:1), 마헬살랄하스바스 (이사야 8:1)
스룹바벨선교회 "Zerubbabel mission" http://www.headstone.pe.kr

재림 예수 소개하는 엘리야

말라기 4:5 보라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보내리니
학개 2:23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가랴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서울시 동작구 국사봉1길 18 5층(상도동3동 323-4) 스룹바벨선교회 새일중앙교회





성경 : 예레미야 37장
제목 : 예레미야의 투옥

1. 북방 바벨론군이 전략상 일시 후퇴 : 1∼5

『 1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이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로 유다 땅의 왕을 삼음이었더라 2 그와 그 신하와 그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 』

"고니야"의 또 다른 이름은 여호야긴이다(열왕기하 24:6). 3개월간 왕이 되었던 일이 있으나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감에 따라 그의 숙부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의 세워줌을 받아 왕이 되었다. 그러나 왕과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바벨론에게 반역하기를 꾀하였던 것이다(열왕기하 24:19∼20, 역대하 36:11∼13).

『 3 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청하되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였으니 4 때에 예레미야가 갇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 가운데 출입하는 중이었더라 』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시드기야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으면서도 사람을 보내어 예레미야더러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주기를 청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① 왕 자신은 스스로 기도하지 못하고 있다.
②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는 않으면서 곤란한 때를 당하면 그의 도우심만 받고저 하는 얄팍함을 보이고 있다.

이는 실상 하나님을 오해한 데서 비롯 되어지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시드기야 왕의 태도는 신앙적인 것이 아니고 이교적(異敎的)인 것이다. 또한 매우 기회주의적인 태도이다.

『 5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 』

이때는 애굽 왕 바로 호브라(BC 588)가 바벨론 군대를 대항하기 위하여 애굽에서 떠나왔다. 이것은 유다가 청병(請兵)한 까닭이었다. 애굽의 소문을 들은 북방군대는 일시적으로 후퇴했다.

2. 예레미야가 적군이 재침할 것을 예언함 : 6∼10

『 6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7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를 보내어 내게 구하게 한 유다 왕에게 이르라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8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취하여 불사르리라 9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스스로 속여 말하기를 갈대아인이 반드시 우리를 떠나리라 하지 말라 그들이 떠나지 아니하리라 10 가령 너희가 너희를 치는 갈대아인의 온 군대를 쳐서 그 중에 부상자만 남긴다 할지라도 그들이 각기 장막에서 일어나 이 성을 불사르리라 』

시드기야 정권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지 않고 하나님보다도 애굽 정권을 의지하였다(에스겔 17장. 예레미야 24:8~1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유다를 버리지 아니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시려고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내용인즉,

① 바로의 군대는 후퇴하여 애굽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7절).
② 북방은 다시 예루살렘에 와서 그 성을 불사를 터이니 유다를 떠나리라고 생각지 말라는 것(8-9).
③ 설혹 유다가 북방을 쳐서 부상자만 남도록한다 할지라도 그 부상자들이 예루살렘성을 불사르리라는 것(10절).

화(禍), 복(福)은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오는 것이다(예레미야애가 3:38). 이를 알고 있는 선지자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유다를 향해 권면도, 책망도 해보았으나 유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배반하고 말았다. 배반자의 최후는 북방 칼에 처참히 쓰러지는 것이었다(예레미야 39장).

3. 예레미야가 투옥됨 : 11∼15

『 11 갈대아인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매 12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에서 백성 중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그리로 가려 하여 13 베냐민 문에 이른즉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먀의 아들인 이리야라 이름하는 문지기의 두목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붙잡아 가로되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

예레미야가 사촌 하나멜에게 밭을 샀는데 그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베냐민 땅으로 갔을 때 문지기 두목이 예레미야에게 "너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하며 오해를 하게 되었다. 이것은 거짓된 누명이다. 이처럼 선지는 언제나 사탄에게 괴롭힘을 받아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게 된다(이사야 52:14).

"베냐민 문"은 예루살렘의 북쪽 문이다(예레미야 8:7. 스가랴 14:10). 이것을 '에브라임 문'이라고도 한다(열왕기하 14:13. 느헤미야 8:16).

유다 백성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의뢰치 않고, 인본주의로 친애굽주의만을 고집하여 바벨론을 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지금의 교회 역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종말에 하나님의 뜻은 오직 새 일이다(예레미야 31:22). W.C.C.나 로마가톨릭의 인본주의, 통합주의, 바벨적 사업은 잠시간은 화려하고 선하게 보여도, 하나님의 새 일 권세 앞에서 경각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이사야 29:5~8).

『 14 예레미야가 가로되 망령되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방백들에게로 끌어가매 15 방백들이 노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으로 옥을 삼았음이더라 』

"망령되다"라는 말은 언행이 보통사람에 비해 심히 어그러져 있다는 뜻이다. 예레미야는 이리야가 자기에게 씌우는 누명이 사실과는 반대된다고 지적한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바른 말을 하여도 방백들이 죄없는 선지자를 때리고 감금한 사실을 보면 당시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무법(無法)하고 부패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4. 시드기야가 선지자를 보호함 : 16~21

『 16 예레미야가 토굴 옥 음실에 들어간지 여러 날만에 17 시드기야 왕이 보내어 그를 이끌어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가로되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가로되 왕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을 입으리이다 』

시드기야 왕이 선지자를 석방하고 그에게 계시유무를 물어본 태도는 그가 방백들보다 선량한 면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역대하 36:11-13절에서는 시드기야 왕을 악한 왕이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왕이 간신배들에게 좌우(左右)되었기 때문이다. 왕은 진실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고, 예레미야를 단순히 여러 점술자들 중 한 사람처럼 취급했던 것이다. 이것은 실로 커다란 잘못이었다.

육신은 옥에 갇혔어도 영적으로는 자유로운 것이 바로 선지자이다. 왕은 육적으로는 자유가 있는 것 같아도 영적으로 마귀에게 포로가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도 마귀 영권(600)과 짐승 정권(60)에 잡힌 지도자가 부패한 교권자들(6)인데,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저들 세력의 행하는 일과 발언에 '아멘'만 연발하고 있으니 실로 밤중의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예레미야 5:30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구약종말은 인간종말의 형편을 자세히 본떠 놓은 형틀과도 같다.

"비밀히" 왜 비밀히 하였을까? 그것은 예레미야를 박해하는 신하들을 두려워한 까닭이다. 시드기야가 왕의 신분으로서 자신의 신하들을 두려워하여 참 선지자를 만나는데 있어 "비밀스럽게" 행동하였다는 것은 정말 큰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 18 예레미야가 다시 시드기야 왕에게 이르되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관대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 19 바벨론 왕이 와서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

예레미야가 자신을 변호하는 장면이다. 요한복음 18:23~ 예수님도 이렇게 자기를 변호하신 적이 있었다. 선지자는 이와 같은 변호를 통해서 그가 선포한 예언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레미야는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 무슨 죄를 범했관대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라고 한 것이다(18절). 예레미야가 북방이 오지 않는다고 말한 거짓 예언자들에 관해 왕에게 이르기를 "평강만을 외치던 종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하였다. 이 내용이 다시 예언되는 종말에는 평화공존 협상주의가 선(善)이라고 외치던 거짓 종들은 북방이 내려올 때 말 문이 막힌 채 두려워하다가 '후 3년 반'에 들어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 20 내 주 왕이여 이제 청컨대 나를 들으시며 나의 탄원을 받으사 나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 내가 거기서 죽을까 두려워하나이다 21 이에 시드기야 왕이 명하여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두고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매일 떡 한 덩이씩 그에게 주게 하매 성중에 떡이 다할 때까지 이르니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 』

20절은 선지자의 탄원서이다. 선지자는 끌려오기 전에 요나단의 집에 갇혀 있었는데 이제 다시는 그리로 돌려 보내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으며, 맡겨진 귀한 사명을 끝까지 완수해야 할 인물이다. 이 탄원은 일개 육신적 죽음이 두려워서 청한 말이 아니었다. 죽음이 무서웠다면 지금껏 매맞고 갇힐 일도 없었겠거니와, 왕의 면전에서 진리대로 말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참 선지자의 존재 이유는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키 위함이다("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계시록 19:10).

시드기야 왕은 그를 시위대 뜰에 두고 양식을 공급하게 하였다. 결과 예레미야는 목숨을 노리는 자들의 손에 넘기워지지 않고 선지자로서의 남은 사명을 다할 수 있었다.











성경 : 예레미야 38장
제목 : 예레미야의 재차 투정(投井)과 구출

1. 예레미야의 피소와 투정 : 1~6

『 1 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와 셀레먀의 아들 유갈과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예레미야의 모든 백성에게 이르는 말을 들은즉 이르기를 』

1절에 기록된 네 방백들은 시드기야 왕의 심복 분자들이다(5절참조). "셀레먀의 아들 유갈과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은 이미 21:1, 37:3절에 등장한 바 있다. 이들이 예레미야의 말을 청취한 동기는 바리새인들처럼 그를 고발하려는 것이었다.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 있으나(37:21), 계속적으로 예언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세상 마귀가 하나님의 종들을 육신적으로 가두는 것은 가능해도 그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만은 가둘 수 없다. 하나님 입에서 한 번 나간 말씀은 아무런 속박됨 없이 반드시 목적지까지 전파되고야 마는 법이다(디모데후서 2:9. 이사야 55:11).

『 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살리라 3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붙이우리니 그가 취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 』

2~3절과 같은 말씀은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러므로 그 말씀대로 되는 날 그것을 지켜보는 자들은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됐음을 부인치 못할 것이다. 선지자가 외치는 말들은 청자(聽者)가 듣고 회개치 않는 한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게 되어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들려주어도 회개치 않는 그들에게는 2~3절이 얼마나 듣기 싫은 고통의 소리였겠는가!

"그의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살리라" 그러나 회개하여 선지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잃을 뻔한 생명을 건짐 받는 구원의 기쁨이 있게 되리라는 예언이다.

『 4 이에 그 방백들이 왕께 고하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치 아니하고 해를 구하오니 청컨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

방백들은 오해하고 참 선지를 공격한다. 하나님의 종은 사실 백성의 해(害)를 구한 것이 아니다.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구하고 있다. 그러나 사단의 흑암이 덮이우니 정치 방백들이 진리를 곡해하여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사실 '회개'라는 것은 영광에 이르는 길이요, 결코 천해지거나 낮은 데로 떨어지는 길이 아닌 것을......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많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이 말은 유익한 말씀을 해로운 것으로 오해하여 말하는 공연한 걱정이다.

『 5 시드기야 왕이 가로되 보라 그가 너희 손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릴 수 없느니라 』

시드기야 왕의 태도는
①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했음이요 ② 무책임했으며 의인을 돌보지 않고 악인의 편에 서 있었다. 그 결과는 비참함과 멸망이었다(예레미야 39장).

『 6 그들이 예레미야를 취하여 시위대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 내리웠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흙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흙 중에 빠졌더라 』

"구덩이"는 물이 없는 웅덩이다. 고난의 풀무와 같다(이사야 48:10).

2. 에벳멜렉의 간청으로 구출함 : 7~13

『 7 왕궁 환관 구스인 에벳멜렉이 그들의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때에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 8 에벳멜렉이 왕궁에서 나와 왕께 고하여 가로되 9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성중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서 주려 죽으리이다 10 왕이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는 여기서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선지자 예레미야의 죽기 전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 11 에벳멜렉이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 곳간 밑 방에 들어가서 거기서 헝겊과 낡은 옷을 취하고 그것을 구덩이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줄로 내리우며 12 구스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너는 이 헝겊과 낡은 옷을 네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 대라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매 13 그들이 줄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낸지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 』

7~13절에는 예레미야가 왕의 환관 구스 사람 에벳멜렉으로 말미암아 그 빠졌던 구덩이에서 구출된 사건이 진술된다.

"환관"은 먼 옛날부터 중동지역과 중국에 많았는데, 왕의 궁녀들과 여자 숙소에서 수종들거나 경호하는 일에 담당했다. 주로 왕의 '시종' 역할을 담당하던 환관을 '내시'라 칭했다(열왕기상 22:9. 열왕기하 9:32, 24:15, 25:19. 역대상 28:1~ 참조). 환관은 통치자가 궁전에 거느릴 수 있는 수많은 아내나 첩에게 가장 적당한 경호원으로 여겨졌고, 왕의 은밀한 규방에서 지낼 수 있는 허물 없는 입장 덕분에 왕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에벳멜렉'의 충언은 그의 지위에서 오는 기회를 잘 살린 경우일 것이다.

왕에게 늘 충언을 올려야 할 유다 방백들은 오히려 예레미야를 죽이려 하고, 보잘 것 없는 일개 이방족 중 한 사람인 '환관'은 참 선지를 구하는 일에 용감히 앞장섰으니 우리에게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세상적으로 똑똑하며 '정통족보'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사단 편에 서고, 세상적으로 무언가 부족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 오히려 진리 편에서 일하는 것은 알파로부터 오메가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진리일 것이다. 이는 사탄이 똑똑하고 유력한 사람을 도구로 이용하기를 즐긴다는 것을 증거해준다. 아모스 선지는 안일하며 마음이 든든한 자들과 이 세상에서 유명하여 우승한 자들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외쳤다(아모스 6:1).

3. 왕과 예루살렘에 대하여 운명을 예언함 : 14~28

『 14 시드기야 왕이 보내어 선지자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집 제 삼문으로 데려오게 하고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한 일을 물으리니 일호도 내게 숨기지 말라 』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를 불러 밀담(密談)을 하였다. "내가 한 일을 네게 물으리니 일호도 내게 숨기지 말라" 예레미야는 바벨론 침략하에 있는 유다에 대하여 그가 받은 계시를 여러 차례 왕에게 말한 바 있다(21:4~10, 32:4, 34:2~6). 그런데도 왕이 지금 또다시 묻는 것은 주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 아니요, 행여나 좋은 소식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맘에서이다. 이러한 사상은 불신앙자의 사상이요, 병든 사상이다. 예수님을 불신한 빌라도의 간사한 태도와 시드기야 왕의 태도는 굉장히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요한복음 18:33~38, 19:10~11). 얼핏보면 참종을 위하는 척 보일 수도 있지만, 본질을 보라! 종말에도 유력자 중 시드기야와 같은 자, 빌라도와 같은 자가 많이 나올 것이다. 재림 시(時)에 이루어지고 있는 계시록과 예언서 곧 '하나님의 비밀'과 '옛적 선지자들의 말씀'을 손에 들고다니면서도 불신하는 자들은 모두가 시드기야와 비슷한 자들이다(이사야 43:8~ ).

『 15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왕에게 아시게 하여도 왕이 단정코 나를 죽이지 아니하시리이까 가령 내가 왕을 권한다 할지라도 왕이 듣지 아니하시리이다 16 시드기야 왕이 비밀히 예레미야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고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붙이지도 아니하리라 』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왕이 단정코 나를 죽이지 아니하시리이까"라고 했다. 이것도 시드기야 왕의 요구에 응하기 전에 그가 전하는 말씀에 대한 왕의 신중한 순종이 있어야 할 것을 암시적으로 내포하여 그를 주의시키기 위한 발언이었다(15절). 지조 없는 겁쟁이와 같은 시드기야 왕은 5절과는 상반되는 내용 곧 예레미야를 죽이지 않고 보호할 것을 서약하였다(16절).

『 17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입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 18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붙이우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

위 진술은 사실상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줄 모르는 그 시대의 분위기로 볼 때 반역자로 몰리기 쉬운 위험한 말이었다(38:4, 37:13).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주 신 말씀인 것이 확실한 만큼 사람의 생각을 섞지 않고 그대로 예언하였다. "항복하면 살수 있다"는 것이 골자이다.

『 19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염려컨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붙이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20 예레미야가 가로되 그 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붙이지 아니하리이다 원하옵나니 내가 왕에게 고한 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존하시리이다 』

예레미야의 항복 권고를 받은 시드기야는 '먼저 항복한 유다인들'의 조롱을 두려워 하며 항복을 주저하고 있다. "항복한 유다인"이란 시드기야의 정책노선과는 반대 노선을 주장했던 자들이므로, 왕은 그들의 항복을 비겁한 처사로 매도했을 터였다. 그러니 예레미야의 말을 좇아 뒤따라 항복하고 말면 그들 앞에 설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닐 판이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그의 성품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시드기야의 이와 같은 행동은 예레미야가 외치는 말씀의 권위가 곧 하나님의 권위라는 사실을 인식치 못한 데서 발생하였다.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20:1~16절의 내용처럼, 시드기야는 당시에 그저 회개하고 "주시는 대로 받겠나이다" 하는 상태까지 마음을 비워 순종해야 했다. 진정 회개한 자는 자신을 죽은 자와 같이 여기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행동하게 되어 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그의 앞길 전부를 맡아 주시는 것이다.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모든 길을 평탄케 하시느니라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을 인하여 죽겠고 미련함이 많음을 인하여 혼미하게 되느니라"(잠언 5:21~23).

『 21 그러나 만일 항복하기를 거절하시면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말씀대로 되리이다 22 곧 유다 왕궁에 남아 있는 모든 여자가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로 끌려갈 것이요 그들은 네게 말하기를 네 친구들이 너를 꾀어 이기고 네 발이 진흙에 빠짐을 보고 물러갔도다 하리라 23 네 아내들과 자녀는 갈대아인에게로 끌어냄을 입겠고 너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바벨론 왕의 손에 잡히리라 또 네가 이 성으로 불사름을 입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

21~23절은 18절의 내용을 재설명한 것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경우에 당할 시드기야의 심판을 다시 일러준다.

"그들은 네게 말하기를 네 친구들이 너를 꾀어 이기고 네 발이 진흙에 빠짐을 보고 물러갔도다 하리라"(22절하반절). 시드기야 왕은 자기가 항복하는 경우에 자기를 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공연한 염려를 하고 있었으나(18절) 예레미야는 그가 항복하지 않을 경우에 더 견디기 어려운 조롱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곧 왕의 궁녀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면서 그를 조롱하리라는 것인데 그녀들의 말인즉 왕의 친구들(거짓 선지자들)이 왕을 꾀어 수렁에 빠치우고서는 목적을 달성하여 물러간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예언이 이제 인간종말에 완전히 적중된다는 데 있다(계시록 10:7~11). 오늘날 소위 자신의 명패 앞에 '진보'자 붙이기를 좋아하는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 치고 공산주의사상을 뒤로 감추고 나온 W.C.C. 속 거짓 선지자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자들은 없다. 공산권 가짜 목자들의 신학에 의해 완전히 속아넘어가 놓고는 자신이 남보다 한 걸음 앞서나가는 진보적인 종이라고 착각하는 인물들이다. 이러한 목자나 그 밑에 있던 성도들은 후 3년 반 바벨론 세계로 잡혀 들어가게 될 터인데, 그 곳에서 자신이 먹이던 양떼 앞에 서게 될 목자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 바벨론에 잡혀간 자기 백성들 앞에 서게 될 시드기야의 모습인 것이다. 이미 5개월 환난 때에 황충떼로부터 죽기까지 괴로운 고통을 당하지만(계시록 9:4~6) '후 3년 반'에 들어가면 조롱당하는 정도를 넘어 구약 시드기야처럼 눈알이 뽑히는 일도 있고, 칼에 쓰러지는 일도 있을 것이다(계시록 17:16. 예레미야 15:2~4).

『 24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너는 이 말을 사람으로 알게 하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25 만일 방백들이 내가 너와 말하였다 함을 듣고 와서 네게 말하기를 네가 왕에게 말씀한 것을 우리에게 고하라 우리에게 숨기지 말라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또 왕이 네게 말씀한 것을 고하라 하거든 26 그들에게 대답하되 내가 왕의 앞에 간구하기를 나를 요나단의 집으로 도로 보내지 말아서 거기서 죽지 않게 하옵소서 하였다 하라 하니라 27 모든 방백이 예레미야에게 와서 물으매 그가 왕의 명한 모든 말대로 대답하였으므로 일이 탄로치 아니하였고 그들은 더불어 말하기를 그쳤더라 28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시위대 뜰에 머물렀더라 』

시드기야 왕은 살 길을 가르쳐준 예레미야의 예언을 반기기는커녕 그 예언 내용을 (비밀스레) 들었다는 사실이 방백들에게 탄로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왕은 왕 된 자로서 자신이 행할 마땅한 의무와 공의를 전혀 집행치 못하고 있는데,

① 온 천하에 공포해야 할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듣고도 감추려 하는 사실에서 그러하고
②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고 있는 사실에서 그러하다.

율법의 대표 모세는 신명기 27:26절을 외쳤다. 은혜의 대표 바울은 갈 1:8절을 외쳤다. 마지막 시대인 환난의 대표 스룹바벨은 이사야 42:9~, 계시록 22:18~19절을 외쳐야 한다.

생사화복(生死禍福)이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을 믿는 자는 사람을 겁내지 않아야 한다. 왕이라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날까 두려워하였고, 방백들은 그 말씀을 공공연히 박해했으니 예레미야는 북방이 치고 올 때까지 감금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28절).

예레미야의 모든 예언은 늘 그대로 성취되었다. 바벨론 군대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을 포위했으나 그때의 유다 민족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당하면서도 믿지 않고 선지자를 박해하였다. 지금도 세계정세는 계시록 9장에 예언된 대로 거짓 평화공존(1958.3월~)의 분위기로 뒤덮여 있다. 그러나 참 선지자는 다니엘 9:26절 말씀대로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하고 외치게 된다. 예언대로 강대국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전쟁조짐이 중동과 극동에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전쟁으로 끝난다"고 말하는 종들이 없고 "평화~평화"를 외치는 종들만 수두록하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이러한 시국에 예레미야서를 다시 예언하는 것은 예레미야의 고통에 동참하는 순종적 행위임과 동시에 그가 받을 면류관을 함께 받게 되는 영광에 참여하는 신앙정로일 것이다. 모든 말씀은 이 시대에 한 말씀도 예외없이 100% 다시 예언될 것이다(계시록 10:1~11, 1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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