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30일 토요일

[동영상] 스룹바벨 선교회 20170930_D_예레미야애가01장 말씀

[토 새벽 교] 예레미야 애가 01장 : 예루살렘(교회)의 황폐를 애곡함 2017/09/30 Saturday Dawn

2016년 2월 29일

Mahershalalhashbaz (Isaiah 8:1), 마헬살랄하스바스 (이사야 8:1)
스룹바벨선교회 "Zerubbabel mission" http://www.headstone.pe.kr

재림 예수 소개하는 엘리야

말라기 4:5 보라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보내리니
학개 2:23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가랴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서울시 동작구 국사봉1길 18 5층(상도동3동 323-4) 스룹바벨선교회 새일중앙교회
(323-4 5F Sangdo 3-dong)5F 18, Guksabong 1-gil, Dongjak-gu, Seoul, Korea






예레미야 애가(哀歌)
- The Lamentations of Jeremiah -

성경 : 예레미야 애가 1장
제목 : 예루살렘(교회)의 황폐를 애곡함

1. 비애(悲哀)의 기도 : 1~11

『 1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

선지자는 그 민족을 대표하여 기도하되 그 당면한 고통으로 인하여 죄책감이 들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다. 소위 선민(選民)이라는 유다 민족의 처지가 이러한 도탄으로까지 떨어진 것은 도대체 웬 일인가?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 드리는 첫마디 기도는 "슬프다"로 시작되었다.

『 2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

"친구들도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애굽인은 당시 유다의 친구였다. 그러나 죄악으로 인해 바벨론 몽둥이로 얻어 맞는 유다에게 애굽이라는 친구는 무용지물이었다. 북방환난으로 당하는 슬픔은 "밤새도록" 눈물이 끊이지 않을 만큼의 커다란 애통임을 알 수 있다. "사랑하던 자""친구"와 같은 의미로 친구는 유다 민족이 하나님보다도 더 의뢰하던 애굽을 의미한다(에스겔 17장 참조).

『 3 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저가 열방에 거하여 평강을 얻지 못함이여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 』

유다가 바벨론에서 당하는 고난은 극도로 괴로운 것이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는 '환난'이라는 단어가 몸에 와 닿지 않을 것이다. 여기 기록된 "환난", "수고", "평강을 얻지 못함", "핍박" 등은 죄값의 결과로서 당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고통이다. 하나님은 선민이 지은 육체의 죄값에 대해서는 이 땅에 있는 동안 보응하신다. 우리 민족이 겪은 40년간의 일제통치나 잊지 못할 6.25 환난 등은 이 나라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값으로 얻어 맞은 몽둥이(a stick; a club; a cudgel)었다. 하지만 이 슬픈 역사는 반대로 이 나라가 하나님 앞에 택함 받은 민족임을 입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제통치와 전쟁의 비극을 겪은 이 민족의 교회지도자들은 오늘날 예레미야와 같이 이 민족이 당할 세 번째 환난을 앞에 두고 눈물로써 다시 예언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4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이 황적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저도 곤고를 받았도다 』

유다 백성이 하나님 앞에 종교적 절기를 지키기 위해 북적북적 발걸음을 옮기던 "시온의 도로"는 얼마나 복된 길이었는가?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도대체 이 역사는 종말을 사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기에, 목숨바쳐 성경을 사수한 수많은 사람의 피값과, 인쇄술의 발달을 통해 '예레미야 애가'라는 제목의 책으로 우리 손에 쥐어졌는가? ..... 그건 바로 이 시대에도 죄악을 행한 교회는 이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다시 예언"케 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계시록 10:11). 은혜를 풍성히 누리며 복받던 피로 산 교회(사도행전 20:28)가 종말이 되어도 때를 몰라 철을 따라 주시는 말씀 양식을 먹지 않고 오히려 평강만 외쳐대는(예레미야 6:14, 8:11) 거짓 선지의 쑥물만 받아 먹고 있으니 결국 대 환난(후 3년 반)에 빠지게 되고, 그 결과가 위와 같으리라는 교훈인 것이다. 노아 때 셋의 계통 중 가인의 후손들과 혼혈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던 무리도 상당히 존재 했었다 . 그러나 그들이 방주를 불신하다가 홍수에 빠져 죽은 것은 육체심판이 무엇이며 영혼구원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려주는 본보기가 된다(베드로전서 3:18~을 보라). 방주를 무시했지만, 하나님께 제사드리던 영들은 예수님의 피 공로에 힘입어 옥에서부터 영혼을 구원받았다. 이것은 종말의 때 아무리 예수님을 영접한 교회라 할지라도 계시록과 선지서의 새 일(방주)을 불신할 때 육체에 구원이 없을 것을 예표한 단 한 번밖에 없는 사건이다. 인자의 때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다(마태복음 24:37).

영혼구원에 덧붙여 이 종말에는 육체구원과 육체심판이 실행됨을 잊지 말라. 영혼구원의 시대에는 심판의 대상이 믿지 않는 자였으나(요한복음 16:9), 육체구원 시(時) 심판의 대상은 계시록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아 딱 멈추고 더이상 나아가지 않으려 하는 피로 산 교회가 된다. 왜냐하면 계시록은 분명 "교회와 종들"에게 듣고 살라고 주신 책이기 때문이다(계시록 1:3~20, 구체적으로는 1:4,11절. 22:6,16절을 참조하라).

『 5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저의 원수가 형통함은 저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

유다 민족을 주장하는 자가 이방인으로 바뀐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의 행한 죄악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구약 때는 이렇게 이방인의 손에 넘겨졌다가 때가 차매 다시 회복을 받았지만, 종말에는 그런 것이 없다. 종말의 역사는 냉정하고 준엄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이제 다가오는 새 일의 역사는 악의 씨를 진멸하는 최종적인 심판이요, 의의 씨를 번성케 할 완전한 새 시대를 이루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때는 후세를 위해 교훈하는 시대가 아니요, 지금껏 기록된 교훈이 최종적으로 열매맺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종말의 부패한 기독교에겐 구약 때의 회복과 같은 소망이 절대 없다. 부패한 교회(음녀)는 이방인의 손에 붙여져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보내며 죽도록 고생하다가 그의 칼에 죽는다(계 17:16). 죽고도 천년간 옥에 다녀 와 백보좌 심판 시(時) 부활하여 영원무궁세계에 들어간다. 부끄러운 구원인 것이다.

피를 믿은 기독교가 영원무궁세계 가는 것(천국시민권)은 누구도 막을 수 없지만, 아무리 피를 믿는 기독교라도 천년왕국 문턱에서 얼마든지 탈락할 수 있다. 모세 때 문설주에 피 바르고 홍해를 건너 간 하나님의 백성이 어찌하여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광야의 시체가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라! 피는 애굽의 노예신분을 벗어던지고 홍해를 가를 조건은 되었지만, 요단강을 건널 때는 법궤에 순종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양의 피와 법궤, 곧 예수 십자가와 그분이 승천하셔서 그 피로 산 말씀을 다 순종해야 새 시대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를 전해도 이단이라고만 하니 가슴이 답답할 뿐이다. 양의 피 = 예수 십자가 피 = 버림돌이다. 이 버림돌에 연합한 자들에게 성령의 인(印) 치심이 있어(에베소서 1:13) 2000 년간 은혜로 양육되었거늘... 이제 법궤(Ark) = 계시록과 예언서 = 머릿돌 = 다림줄 = 하나님의 인(印) 의 시대가 왔건만(학개서 2:23, 스가랴 4:7~10) 가나안을 앞에 두고 또다시 광야의 시체로 쓰러지려 하는 것인가? 여호수아, 갈렙과 같은 장부의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이 아닌가? 법을 몰라 구원의 도리를 올바로 전하지 못하는 종들은 3대 화가 올 때 그 첫 번째 화에서 죽기까지 괴로움을 당한다는 것이 계시록이 말하는 첫째 화의 비극이다(계시록 9:4~6).

『 6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저의 목백(牧伯)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이 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림 같도다 』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유다 나라의 영광이 떠났다는 것이다. 유다의 "영광"이란 하나님이 그들의 예배를 통하여 함께 해 주시며 시온을 당신의 거처로 삼아 오신 그 사실을 말한다(시편 132:13~14).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아니 하시느냐에 따라 목백(Prince) 곧 지도자들이 흥왕하기도, 쇠망하기도 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 때에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유다 나라를 버리시니 그 나라의 영광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은 모두가 무력해져 버렸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잊지 말고 신랑 예수를 대적하는 짐승정권,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조금이라도 용납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극상포도 심은 농부가 바라는 마음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변치 않는 포도열매이다.

『 7 예루살렘이 환난과 군박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 백성이 대적의 손에 빠지나 돕는 자가 없고 대적은 보고 그 황적(荒寂)함을 비웃도다 』

생각 밖에 북방의 포로가 되고보니 옛날 예루살렘의 자유가 그립도다. "그 황적함"이란 그 나라의 모든 행사들 곧 사생활부터 시작하여 공생활이나 예배행위까지도 폐지된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전 "환난과 군박(핍박)"을 통하여 다가올 환난과 군박에 빠지지 않도록 지혜 있는 다섯 처녀가 되어야 할 것이다(마태복음 25:1~10).

『 8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불결한 자같이 되니 전에 높이던 모든 자가 그 적신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저가 탄식하며 물러가도다 』

유다를 높이던 자들도 이제 와서 그들을 업신여기고 있다. 이유는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불결한 자"같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 죄악 때문에 속이 썩어 있었음에도, 썩은 속을 도려내 회개하라 외치던 선지자를 때리고 무시했으니 그들의 종교생활은 회칠한 무덤이었다(마태복음 23:13~39). 형식과 외식으로 겉을 포장하다가 북방 바벨론이 와서 회칠한(whitewashed) 무덤을 파헤치니 그 썩은 냄새가 만천하에 진동하게 된 것이다. 전에 높이던 자의 "업신여김" 앞에서 시온의 딸인 예루살렘은 수치스럽게 탄식하며 뒤로 물러가고 있다.

말세 교회들도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아 지도자들은 양 떼를 속이고 양 떼는 쑥물을 먹으며 속지만(예레미야 9:15, 23:15) 북방 러시아가 내려오는 날에는 더 이상 속일 수 없이 거짓 평화공존의 썩은 냄새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스룹바벨 선교회의 다시 외침을 멸시하던 모든 교회의 외식과 감추어진 죄악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이다. "저가 탄식하며 물러 가도다" 벌을 받고서야 죄를 깨닫고 수그러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종말(추수기)에는 벌을 받으면 그로서 끝장이지 새로 시작해 볼 수 있는 무엇도 남지 않는다. 6,000년 인류역사는 동방역사, 새 일의 역사로 종결되고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때문이다.

땅에서 펼쳐지는 회복된 고토, 곧 제 7,000년기의 에덴동산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9 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결국을 생각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게 낮아져도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

유다 민족이 "놀랍게 낮아졌다"고 함은 너무도 갑자기 그 처지가 바뀌어진 사실을 말한다.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결국을 생각지 아니함이여" - 이것은 여인의 음란이 치마에 나타난 것처럼 유다 민족의 죄악이 노골적으로 탄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기들의 받을 벌을 생각해봄조차 없다는 것이다. 양심의 타락으로 철면피(鐵面皮)한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불택자는 이 세상에서 마음 놓고 죄지으며 제 세상처럼 살다가 영원한 형벌로 떨어지지만, 택민에게는 죄악이 관영할 때에 벌이 따르게 된다. 고로 택민 유다는 민족 죄악으로 인해 필경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70년간의 포로 생활은 그들의 죄악이 컸음과 그들이 여전히 주의 택한 백성임을 알려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 10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을 금하여 주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사오나 저희가 성소에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

이방인들은 거룩한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법인데 이제 그들은 기탄없이 성전에 들어와 성전 기구들까지 가져갔다. 알곡들에게는 이 이상으로 마음 아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선지자들은 이를 슬피 여겨 탄식한다. 거룩(구별)한 성전이 이방인에게 침범을 당하게 되는 것은 사명자들이 범죄하고 제 사명을 감당못했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행하지 않고 인본주의로 기울어 자기들 마음대로 행했기 때문이다. 지도자와 백성이 모세 율법을 실행치 아니할 때 여러 선지자가 애타는 마음으로 예언했지만 끝까지 불순종하므로 심판이 내려졌다. 종말에도 피로 산 교회가 다시 예언하는 종말의 외침(계시록 10:7~11)을 불순종한다면 공의의 심판이 뒤따를 것이다(교회 심판은 베드로전서 4:17, 이사야 43:28, 이사야 66:6. 에스겔 9장을 참조 - 더 자세한 내용은 “성전부터 심판" 클릭).

『 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소성시키려고 보물로 식물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  』

성성(聖城)이 원수의 압제와 포위로 인하여 양식이 핍절된 사실을 말한다. 백성들이 살아보겠다고 보물로 식물을 바꾸는 사실을 보니 성 안의 기아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알 수 있다. 종말을 위해 들어 쓴 구약의 주인공인 육적 이스라엘에게는 육적 재앙이 임했었다. 그러나 종말의 심판 때는 영적 재앙과 육적 재앙이 모두 임한다. '전 3년 반'은 영적인 기근과 기갈로 황폐해질 때요, '후 3년 반'은 이렇게 된 교회가 육적으로 멸망하는 때이다.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유다가 하나님보다 육을 만족시키는 음식물을 더 사랑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벌을 내리신 것이다(에스겔 4:16~17).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소서" 선지자는 극도의 국난(國難)에 대하여 탄식하면서도 낙심치 아니하고 주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종에게 있어 '낙심'은 죄악이다. 오직 용기있게 돌진하며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낙심'에 빠진 자는 기도할 수 없는 법이요, 해본들 상달될 수 없는 법이다.

2. 하나님의 정의(正義)의 징치(懲治)와 재화(災禍) : 12~19

『 12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

선지자는 유다 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인데, 그러한 그가 심히 놀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민족이 극도로 심한 환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더욱 징계하시기 때문인 것이다(잠언 3:11, 히브리서 12:7 - "아들징계" 참조). 선지자는 이 진리를 알고 민족을 대표하여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 13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베푸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고적하여 곤비케 하셨도다 14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케 하셨음이여 내가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붙이셨도다 』

선지자는 이 민족에게 임한 환난이 인력(人力)으로는 막을 수 없는 천래(天來)의 것임을 지적한다.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라고 함은 그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이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뜻이고,
"내 발 앞에 그물을 베푸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다" 함은 유다 민족으로서는 어찌 손을 써볼 수도 없는 무적(無敵)의 환난이 "그물"과 같이 임했다는 것이다.
"종일토록 고적하여 곤비케 하셨도다"는 것은 그가 환난에 처하여 기쁨이 없고 병들었다(곤비)는 뜻인데, 환난 때문에 심히 쇠퇴하여진 유다 민족의 처지에 대한 표현이다.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유다가 당한 환난이 그 민족이 범한 죄악 때문임을 밝힌다. 멍에를 그 목에 얽어매듯이 죄악의 짐이 이제부터 유다민족의 목덜미를 짓누를 것이니 그 죄악을 속하기까지의 부담이 심히 클 것을 "피곤"으로 표현하였다.
"내가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붙이셨도다" 강한 나라 바벨론의 침략을 당하여 패망케 된 사실과 더불어 그 통치 아래서 죄악 탕감의 기간 70년을 싫건 좋건 겪어야 함이 내포되어 있다.

『 15 주께서 내 지경 안 모든 용사를 없는 것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소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유다를 술 틀에 밟으셨도다 』

유다가 당하는 수난이 상상할 수 없었던 일로 연출되는 상황을 묘사한다. 믿었던 대로 일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일이 전개될 때에 사람들이 마땅히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유다는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의지했고 용사들의 힘을 주의 힘보다 더 믿었던 것이다. 그들의 생각에는 그 용사들의 손이 능히 갈대아 군사들을 막아줄 수 있을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막상 일을 당하고 보니 사태는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는 이러한 황당한 비극을 "성회를 모아 내 소년들을 부수심이여"라고 표현한다.
"유다를 술 틀에 밟으셨다"는 것은 '철저한 심판'을 의미하는 통상적인 은유이다. 밟으신 분이 하나님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이는 종말의 기독교 역시 패역하여 죄악을 범할 때 자신을 피로 사신 예수님께 '철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알려준다. 계시록 14:19~20절이 그것이다. 심판은 임박해 있다.

『 16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17 시온이 두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면에 있는 자를 명하여 야곱의 대적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저희 가운데 불결한 자 같도다 』

선지자에게 슬픔이 임한 것과 동시에 그 민족에게도 마땅히 그리해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징벌로서 임한 환난 앞에서 사람들은 마땅히 마음을 부드럽게 가지고 애통하며 회개해야 함을 의미한다. 유다가 당한 고통을 선지자 개인의 고통과 합치시키고 있다. 이는 유다에 남아서 잡혀가는 백성을 보며 느끼는 선지자의 슬픔이기도 하며, 동시에 상처당한 유다 민족이 열국 가운데 "불결한 자"와 같이 되어 모두들 유다를 떠나가고, 홀로 더러운 처지에 남아 있는 민족의 슬픔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누구든지 죄악으로 인해 징벌받는 그들을 멀리 하기를 원하고 있다. 죄악이 관영한 기독교회가 심판받는 그날에 기독교를 애처로이 보아줄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 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근심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와 소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

본절의 상반절에 또 다시 수난자의 회개를 진술한다. 고통 중에 있으면서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하는 것은 그들이 당한 처지가 하나님의 벌이라 생각하며 매를 순히 맞는 자녀의 마음이니 자기 스스로 자기를 벌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귀한 회개의 마음이다. 다윗도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편 51:4) 하였다. 예레미야는 유대 민족의 회개 심리를 대신 표현하여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라고 한다. 이어서 그는 "나의 처녀와 소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라고 말함으로 자기가 당하는 고난이 자기의 범한 죄와 관련되었다는 의미로 또 다시 그 민족의 처참한 수난 광경을 애처롭게 묘사한다. 민족을 사랑하는 선지자의 중보의식을 볼 수 있다.

『 19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 저희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소성시킬 식물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였도다 』

[유다 민족이 바라보던 맹방과 원조가 그 본래의 약속대로 실행되지 않은 사실이 진술됐다(상반절). 여기서 이른 바 "내 사랑하는 자"란 유다 민족이 의뢰하던 애굽을 말함이다. 애굽은 유사시(有事時)에 유다를 돕기로 약속했었으나 막상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았을 때에는 도와주지 않았다(에스겔 30:21~26). ]

[바벨론의 침략을 당했을 때 침략 자체만으로도 비극이었겠지만 참다운 지도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비극을 더욱 처참케 한다(하반절). 평안한 때에는 이런 흑막(黑幕)을 가리우고 나서서 어디까지나 남들을 위하는 지도자인 듯이 자처한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 본색이 탄로될 날은 오고야 말았다. 종말에도 거짓 선지자는 다 이와 같다. 구약 때 참 선지자가 예레미야 한명뿐이었던 것은 종말에도 올 환난을 바라보고 울며 기도하는 참 사명자가 많지 않을 것을 보여준다. 종말의 지도자들 모두가 평강, 협상, 화합만을 외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의 말이 옳은 듯하여도 이들은 경각간에 도래하는 환난 앞에서 모두 기절하고 말 것이다.]

3. 고민 중에 하나님께 슬프게 구함 : 20~22

『 20 여호와여 돌아보옵소서 내가 환난 중에서 마음이 괴롭고 마음이 번뇌하오니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으로는 칼의 살륙이 있고 집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나이다 21 저희가 나의 탄식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고 나의 모든 원수가 나의 재앙을 들었으나 주께서 이렇게 행하심을 기뻐하나이다 주께서 반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시리니 저희가 나와 같이 되겠나이다 22 저희 모든 악을 주 앞에 나타내시고 나의 모든 죄악을 인하여 내게 행하신 것같이 저희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곤비하니이다』

예레미야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민족을 대표하여 중보기도를 한다. 그의 회개기도는 환난 그 자체보다도 자신의 죄악 때문이었다. "환난을 당할 때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선지자는 그 환난 중에 위로를 받기는커녕 도리어 그의 환난 당함을 기쁘게 생각하는 원수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의 원수들이 보응(retribution; nemesis)받게 될 사실을 내다보고 기도한다. 누구든지 원수의 실패를 보고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벌하신다(잠언 24:17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그러므로 성도는 타인의 실패를 보고 기뻐할 것이 아니다(로마서 12:19~20). 도리어 자신도 그렇게 될까 두려운 마음으로 항상 삼가며 기도해야 할 뿐이다(갈라디아서 6:1).

"주께서 반포하신 날"이란 유다가 회복될 날을 의미한다. 유다가 회복되는 날(70년 회복)은 유다의 원수가 무너지는 날이니 하나님의 크신 공의는 치우침이 없이 실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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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스룹바벨 선교회 20170929_요한계시록22장 말씀

[금 오후 교] 요한계시록 22장 : 알파와 오메가 2017/09/29 Friday Afternoon

Mahershalalhashbaz (Isaiah 8:1), 마헬살랄하스바스 (이사야 8:1)
스룹바벨선교회 "Zerubbabel mission" http://www.headstone.pe.kr

재림 예수 소개하는 엘리야

말라기 4:5 보라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보내리니
학개 2:23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가랴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서울시 동작구 국사봉1길 18 5층(상도동3동 323-4) 스룹바벨선교회 새일중앙교회
(323-4 5F Sangdo 3-dong)5F 18, Guksabong 1-gil, Dongjak-gu, Seoul, Korea





성 경 : 계시록 22:1∼21
제 목 : 알파와 오메가


하나님은 미(美)의 하나님이시다. 택자에게 아름다운 도성을 주심은 아름다운 사람을 이루어 아름다운 생활을 하게 하는 데는 생명수 강물을 마시게 하고, 생명나무 열 두 가지 과실을 먹게 하며, 다시는 저주가 없는 세계에서 하나님을 섬기되 광명한 나라에서 세세왕권을 누리면서 섬기게 하려는 데에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당신이 받으실 영광이 되는 것이다. 이 '영광'을 위하여 주님께는 하나님의 3대 위력이 있으셨으니 다음과 같다.

1. 천지를 창조하신 위력 : 창세기 1:1∼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여기에 태초라는 것은 창조적인 태초를 말했으니 이 창조라는 것은 물체적인 창조를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물체에 창조의 위력을 들여보내어 역사한 것이 첫째 날에 된 일이다. 땅이 혼돈, 공허, 흑암에 잠겨 있었던 것이니 물체 자체에는 힘이라는 것이 절대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조물주의 창조력의 힘이 아니라면 물체는 자동적으로 혼돈, 공허, 흑암의 상태임을 성경은 말해준다. 사람의 몸을 흙으로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으니 흙덩어리가 움직이면서 사람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그 힘을 거두어가시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서 인형(人形)은 혼돈, 공허, 흑암이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위력이라는 것은 목적 없이 움직이는 일은 절대 없다. 그러므로 태초에 창조력이 물체에 들어와 움직이는 그 목적은 하나님의 미의 세계를 이루자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미(美)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이루되 미의 사랑으로, 미의 생활로, 미의 세계로 이루어서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세세 영광을 드러내시며 사람과 동거동락하겠다는 목적이 태초의 창조의 힘을 발휘하게 된 동기인 것이다. 즉 하나님은 목적이 곧 동기이고, 원하시는 바가 곧 수단이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이사야 43:13)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이사야 46:10~11).  하나님께서 이 거대한 일을 시작하셨으니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무리 쓸만한 사람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이루고야 만다는 것이 조물주의 무소 불능한 힘의 활동일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심은 조물주 하나님께서 인생이 어떻든지간에 당신의 능력 안에서 인간을 통하여 그 목적을 이루고야 만다는 뜻을 발표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첫째 아담의 범죄로 죽었던 인생을 다시 살릴 능력도 있고, 살아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영접할 자는 영원히 죽지 않도록 변화시킬 능력도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한 번만 말하고 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시대 시대를 따라서 주신 말씀은 알파부터 오메가를 완전히 이루시되 끝을 이루기까지 때에 따라 주신 양식인 것이다.

2. 천지를 없애는 위력 : 계시록 20:11∼

『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

하나님의 창조는 영원을 목적한 것도 있고, 특수 사업적인 목적을 위한 것도 있는데, 물질세계를 창조한 것은 영원한 천국으로서 창조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영원한 천국으로 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사업적인 창조이기 때문에 사업이 완성되는 그  때에는 창조시의 위력의 역사로 이 세계를 다시 없애는 위력을 발하사 신천 신지 세계를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이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첫째 아담의 실패로 잃었던 축복을 누리기 위한 성도의 왕국이 다시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을 다 이룬 천년왕국은 천년이 찰 때 사라진다. 이것을 없애는 것은 - 신천 신지의 영원한 왕국을 목적했기 때문에 - 죽은 자를 부활시키고 살아 남은 자를 무궁세계로 옮기기 위해서이다. 대 심판을 행할 때에 사업적인 목적으로 창조한 물체는 다시 혼돈, 공허, 흑암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물체 속에서 역사하던 창조주의 위력이 물체에서 옮겨가기 때문에 다시 태초의 근본적인 혼돈, 공허, 흑암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3. 신천 신지를 이루는 창조의 위력 : 계시록 21:5∼7, 22:1∼5

『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

『 22:1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

하나님의 신천 신지 화려한 도성은 이기는 자를 위해서 창조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물질세계가 사람을 생육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신천 신지의 영원한 천국은 이기는 자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다. 그러므로 생육하는 물질세계에서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한 자는 아름다운 도성의 왕권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잠간 동안의 생육적인 물질계에서 올바로 자라서 올바른 열매를 맺었다면 영원한 무궁세계에서 영원한 만물을 기업으로 누린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하나님께서 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것은 영원히 살 수 있는 부활체를 가진 신령한 몸이 먹고 마시고 누리는 생활에 필요한 생명의 세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생명나무 생명수가 식물이 되고, 열 두 진주보다도 좋은 보석으로 쌓은 성이요, 정금 보다도 더 맑은 유리 바닥을 깔았고 해와 달이 쓸데없는 빛의 세계이다.

또한 이 세계는 영원히 보전되는 것으로 지은 도성이다. 이 성에는 소제도 필요 없고 죽음, 고통, 슬픔이 하등에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체가 영광이요, 미(美)요, 거룩이요, 평강이니 이것을 피조물 된 사람으로 함께 누려 보자는 것밖에는 하나님은 다른 목적이 없으시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활동으로만 이루어지는 영원한 무궁세계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이 무궁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준 것이 하나님의 비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조금도 거짓이 없고 참되고 신실한 말씀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성경은 각 권들의 기록된 목적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 시대마다 법이 있으니 이것이 7대법이다.

성경은 한 시대를 목적한 것이 아니기에 여러 시대에 걸쳐 성취가 된다.  율법이 기록된 목적은 은혜 새 시대를 주실 목적인데, 율법을 받았던 택민이 은혜시대를 모르고 반대하다가 오히려 저주를 받았다. 마찬가지로 은혜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로 은혜 받은 교회들이 환난시대 하나님의 심판의 비밀을 모르면 큰 환난에 빠지게 된다.

종말에 기독교의 혼선은 성경을 기록한 목적의 차이점을 몰라서 초래된 결과이다.

◈ 그러면 성경 기록의 목적을 살펴보자!

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자는 목적으로 기록된 성경이 있다(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4복음서는 기록의 차이점이 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로부터 기록이 시작되었고,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전도로부터 시작이 되었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출생부터 기록이 시작되었고, 요한복음은 영원 태초에 관하여부터 기록이 시작되었다.

이 책(4복음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록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고 갈라디아서 6:14∼ 편지를 썼다.

베드로후서 1:19∼ 베드로는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으니 너희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고 했다.

※ 이들이 예수의 십자가를 전한 것은 하나님의 책 예언서 중의 한 부분인 은혜시대의 관한 예언만 찾아서 증거하는 것이 바로 사도의 사명이기 때문이다(이사야 49:8절 상반절을 바울이 고린도후서 6:2절에서 증거했으나 이사야 49:8절 하반절은 증거하지 않은 것은 그는 메시아의 사명만 증거하는 사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심판 때에는 말세 종이 다시 그 다음 부분을 읽어서 모든 예언서를 증거하여 말씀 성취가 되어야 새 시대가 이루어진다).

② 환란 때 종으로 바로 역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책(계시록 22:6∼).

종말에 무서운 환난 재앙이 올 때 종들과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은혜 받은 많은 종들에게 읽고 듣고 지키라고 기록하신 책이 바로 계시록과 선지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받았으나 재림의 날에 예수님의 계시를 모른다면 재림하실 주님을 어떻게 증거할 수가 있겠으며 자신을 황충떼의 공격으로부터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계시록과 선지서를 모르면 황충이의 밥이 된다.

계시록 10:10∼11절 같이 말세 종들은 작은 책 계시록을 꿀같이 먹고 온 세계에 다시 예언하여야 한다고 하셨다. 계시록 11:1∼12에는 1260일 예언을 증거하고 쓰러졌다가 생기를 받아서 구름을 타고 공중에서 재림의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고 하셨다.

③ 교회로 환난에서 구원받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책(계시록 22:16∼).

십자가로 세운 교회가 재림의 날에 촛대교회가 되기 위해서 계시록이 기록되었다.  누구든지 짐승의 표를 받으면 세세 불못에 들어간다는 것이다(계시록 14:9∼). 종말의 구원은 영육간의 구원이다. 땅에서 왕노릇하는 구원이다.

◈ 시대마다 역사하는 교회의 사명은 그 목적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① 율법시대 교회는 광야교회인데 인간의 죄를 가르쳐 주고 또한 속죄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양을 잡으라고 하셨다(사도행전 7:37∼38).

② 예수님의 피로 산 교회가 은혜시대 교회이다. 예수께서 택자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단번에 사하셨다는 것이다(사도행전 20:28, 히브리서 9:12).

③ 주 재림 때 촛대교회가 세워지므로 종말의 미혹해보는 마귀 미혹을 이기게 하자는 목적을 둔 교회이다(계시록 1:13∼20, 11:1∼12, 12:1∼5).

율법 교회에서 복음적인 은혜교회로 넘어 올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사도들을 박해하고 반대한 자가 바로 하나님의 택자라는 율법 교회였으니 이는 시대적인 교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데서 빚어진 범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종말에도 은혜시대 교회에서 환난시대 교회로 넘어 갈 때에 여호와의 책인 예언서를 깨닫지 못한 은혜시대 교회가 촛대교회 역사를 반대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에 부패한 교권주의자들이 종교 협상으로 안일을 얻고자 하지만 협상이라는 것은 오메가 때에 오는 마귀의 미혹인 것을 알아야 한다.

알파 때에 아담의 가정이 뱀의 미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먹고 죽었는데 이제 뱀의 앞잡이 붉은 공산당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예언서를 몰라서 크게 속고 있는 것이다.

종교 협상주의가 현재 세속적인 시대를 따라가는데 이것은 바벨인 것이다. 교회의 사명은 빛의 사명이니 어두움이 무엇인지 이 시대에 가르쳐 주고 이 시대를 빛으로 인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교회가 할 일이다.

세계교회가 협상을 하므로 쑥물을 먹고 죽는데, 이 때에 우리 사명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깨닫고 무장하여 교회를 살려야 한다. 우리는 교회 없이는 믿을 수 없고, 교회 없이는 싸울 수 없고, 교회 없이는 보호받을 수도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교회를 중심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 그런고로 성경 전체의 흐름을 논해보면

① 메시아가 올 것이란 율법적인 교훈도 있고(창세기 49:10. 창세기3:15),

②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믿게 하는 은혜의 교훈도 있고(요한복음 7:16),

③ 다시 오실 재림 주를 영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새 일의 교훈도 있다(이사야 42:9).

사람은 교훈을 따라서 인격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된 은혜 때의 인격은 그리스도와 같이 순교할 수 있는 인격이 되고, 재림 주님 맞이할 새 일의 교훈으로 형성된 인격은 재림의 주와 같이 철장권세의 종이 된다. 이들은 모든 원수를 짓밟고 그리스도와 같이 동행하게 된다.

◈ 성도는 예수님의 부탁을 알아야 할 것이다.

① 초림의 부탁 : 사도행전 1:6∼11

예수님이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승천하실 때의 부탁은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신의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라"는 부탁이었다. 주님의 부탁은 예수님이 하실 일을 인간이 해야 된다는 것이다. 천국복음 운동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과 사람의 할 일이 결합되기 전에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적인 역사를 하기 위하여 승천하신 것이니, 중보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향하여 할 일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할 일을 다 이루기 위한 중재의 역사이다.

죄를 사함 받는 역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되어지기 때문이다(사도행전4:12). 올라가는 기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려오는 성령의 은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되는 것이니 속죄를 받는 자도 인간이요, 성령을 받는 자도 인간이요, 이것을 만민에게 증거할 일도 인간이니, 이것을 위하여 쉬지 않고 하늘 보좌 우편에서 역사하여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이다. 민족, 국경의 차별 없이 땅 끝까지 증거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첫 번째 부탁이시다. 사도들은 이 일에 동원이 되었다.

②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부탁 : 계시록 22:6∼7

재림이라는 것은 올라가신 예수님의 부탁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야 되는 것이니 다시 오실 때는 예언의 말씀을 지켜야만 복이 있다는 부탁을 요한에게 하셨다. 요한은 첫 번째 부탁도 순종했는데, 또 두 번째 부탁을 받은 자이다.

만일 어떤 종이 가시는 주님의 부탁만 존중히 하고 다시 오시는 주님의 부탁을 등한히 하고 무시한다면 주 재림 시에 남은 종이 될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가시는 주님의 부탁을 무시한 자가 초림의 주님을 영접할 수가 없었으며,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대교회가 예수님의 대적이 되었다. 또 가시는 주님의 부탁을 존중히 여겨 메시아를 영접했던 은혜시대 종들이라도 다시 오시는 재림의 주님의 부탁을 무시하면 오히려 대적이 된다. 이것은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께서 충성된 종은 주인의 집을 맡아서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준다고 마태복음 24:45∼ 예언하셨다.

주께서 승천하신 때에는 죄인을 불러들이는 때요(은혜시대), 다시 오시는 때는 죄인을 심판하는 심판기이기 때문이다. 재앙도 예언대로 내리고 재앙을 피하는 것도 예언대로 피하기 때문이다. 예언서는 재앙 중에도 재앙을 받지 않게 하겠다는 목적이니, 이 예언을 지키는 자는 주님이 책임져 주시고, 지키지 않는 자는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재림의 때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으니 노아 같이 순종하는 자가 되자! 종이란 것은 주인의 부탁을 받은 대로 순종할 것뿐이고, 그 밖에는 주인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니 가실 때의 부탁은 사도가 받았으니 사도적인 사명은 그 부탁대로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

선지의 사명은 예수님 다시 오실 때에 "예언을 읽고 듣고 지키라" 전하는 사명이니 바로 듣고 전해야 할 사명에 순종하는 것이 마지막 권세 받을 증인의 역사이다. 참되고 신실한 말씀을 순종한 자가 황금보석 꾸민 집에서 세세토록 왕권을 누린다는 것이다.

노아, 아브라함, 선지자들, 사도들이 주님께 순종했듯이 이번에는 우리의 차례이다.

4.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계통적인 영적 전투 : 계시록 13, 16

『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

현재 북방 세력이 구약의 앗수르와 같은 계통이라면 우리 성도들은 다윗의 뿌리가 되는 임마누엘 예수의 계통이다. 우리가 21세기에 태어났다 하여 2~3천년 전의 성경 속 나라, 왕, 개인들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 하나만 싸우면 되는 독립적인 사명자가 아니고 알파와 오메가를 관통하는 계통적인 사명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나는 다윗의 뿌리요 동시에 그 자손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의 신성(뿌리)과 인성(가지)을 가르친 것이다(계시록 22:16).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나시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인 신으로 역사해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다윗 왕국을 이루었으므로 다윗의 뿌리가 되는 신성을 가졌고, 또 다윗 가문의 자손으로 탄생하시어 완전히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으므로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다윗 왕국에 들어갈 자들을 세계적으로 일으켜 주셨다(은혜시대). 이제 종말에 변화 성도들을 통하여 지상에서 마귀 세력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대 승리를 이루게 될 것인데, 이 거대한 싸움의 영역에서 예수께서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으로 중심에 계신 것이다.  

현재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 북방 세력이 아무리 강하고, 이방 종교의 구원을 인정하는 변질된 기독교 무리가 아무리 많아진다 한들, 저들 정치, 종교적 음녀들은 예수의 피와 말씀을 믿는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게 멸망을 당하게 되고 새 시대가 오게 된다. 이 때 변화성도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정신이 그대로 계승된 이 시대의 진정한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싸움은 21세기로 국한된 싸움이 아니요, 구약과 종말을 아우르는 계통적인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 싸움의 승리자는 절대로 이방 세력과 협상하지 않고, 끝까지 말씀의 지조를 지켜 임마누엘 날개 아래 보호받아 새 시대를 이루는 핵심 세력이 된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이다(이사야 10:22∼23).

참된 말씀에 목숨 바쳐 싸워서 권세종이 되자!

참된 말씀 없는 사랑은 계시록 17장같이 짐승을 탄 음녀의 사랑이다. 이 시대에 고명한 자는 욕을 먹어도 기록된 말씀대로 행하는 자이다. 참되신 하나님은 참되신 말씀을 알려 주시고 그 말씀을 지키는 자를 구원하러 오시니 예언서를 지키는 자라야 복이 있다는 것이다(6∼7).

이와 같은 영원한 기업을 주기 위해서는 완전한 말씀이 계신 동시에 사람은 이 말씀을 지킬 책임이 있고, 천사는 말씀을 지키는 자를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8∼9).

이 예언의 말씀은 심판의 다림줄이니 이 말씀을 인봉하지 않고 세상이 알도록 전할 때에는 쭉정이와 알곡을 가를 때이다(10∼11). 다시 오시는 주님은 줄 상이 있되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준다는 것이다(12∼).

누구든지 완전히 죄사함을 받은 자는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을 도성에 들어갈 권세가 있다(13∼14).

주님께서는 환난 가운데서 교회를 보호하고 인도하여 새 시대의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보여준 것이니, 예수님은 광명한 새벽별과 같이 빛나는 역사를 나타내신 것이다(베드로후서 1:19).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게 되지만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듣고도 가감하는 자는 재앙의 날에 재앙을 받게 되는 동시에 거룩한 성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것은 재앙기에 영과 육이 아울러 구원받는 진리를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16∼19).

우리 주님은 말씀대로 진실로 속히 오실 주님이시니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할 자는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야만 할 것이다(20∼21).

마태복음 25:1∼ 열 처녀 비유에도 지혜 있는 다섯 처녀가 되라고 예수께서 예언하셨으니 우리는 스가랴 4장 같이 순금등대 촛대교회가 되기 위하여 모든 예언서를 햇빛같이 밝힌 애굽땅 중앙제단에 모여서 완전무장을 해야 할 것이다. 영적 밤중에 신랑 예수께서 오실 때 등불이 없는 자는 쫓겨날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살고 있으니 이것을 분명히 깨달아 지혜 있는 종들이 되어 재림의 주님을 영접하도록 해산의 수고를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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