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일 토요일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는 역사 (요한복음 17:21∼24)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는 역사
- 요한복음 17:21∼24 -

요한복음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

인류 역사상 하나가 되는 일은 심히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 것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온전함을 이루게 됨으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신 것이다. 완전한 나라라는 것은 온전함을 이룬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온전함을 이루어서 하나가 되게 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주 안에 있게 되므로 하나가 됨 (21)

주 안이라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서 아들에게 사명을 맡기어 세상에 보내시므로 아들이 그 뜻에 순종하므로써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일을 한 것과 같이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나'라는 자체는 다 각각 다르지만 주님의 사랑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므로 아드님을 보내셨고, 그 아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므로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될 때에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행하기 위하여 역사할 때 우리는 그 사랑에 이끌려서 하나가 되는 가운데 그리스도 품 안에서 도덕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완전히 받아서 그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만이 하나가 될 수 있고 그 밖에서는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타락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2. 영광을 받음으로 하나를 이룸 (22)

세상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서로 물고 싸우다가 피차에 망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 자는 완전한 인격으로서 하나를 이루기를 성부, 성자가 하나를 이룬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은 만족한 영광을 소유하게 될 때에 더 이상 좋은 것을 바라지 않게 되므로 명예의 욕이나 물욕이나 그 밖의 모든 정욕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왜냐 하면 정욕이라는 것은 완전한 것을 받지 못한 타락한 인생이 만족이 없음으로 더 얻어 보려는 마음이 있을 적에 정욕이라는 것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받은 자는 세상 영광을 분토같이 보게 되므로 만족함을 얻은 인격으로 하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종이 세상의 어떤 영화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지 못한 증거라고 본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 본문에 하신 말씀은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라고 하였다. 우리 인생은 주께서 주시는 영광을 받은 자가 아니고는 완전히 하나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3. 성부 성자의 일체된 역사로 하나를 이룸 (23∼24)

하나님께서 인생을 일남 일녀로 창조했지만 선악과를 먹은 아담하와의 몸에서 가인아벨이 나오게 되므로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형이 동생을 때려 죽였다는 것이 아담, 하와의 처음 열매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은 가정은 골육 상쟁의 비참을 이루어서 피로 이 땅을 적시는 일이 시작된 것이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는 아브라함이라도 이스마엘이삭이 나오므로 원수가 되었고 이삭의 몸에서 에서야곱이 나오므로 원수가 되었고 야곱의 몸에서 열 두 아들이 있었지만 하나를 이루지 못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치 않은 아담, 하와의 혈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생자 예수님이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므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를 이루는 역사로 말미암아 타락한 우리에게 완전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의 완전 역사로 말미암아서 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첫째 아담이 하나님과 의합하지 않으므로 인간의 싸움이 왔고, 둘째 아담 예수님이 하나님과 의합하므로 싸움이 없는 평화 통일의 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소원이 온전한 사람으로 하나가 되어서 나라를 이루는 것이요, 사람이 원하는 것도 누구나 다 하나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는 역사를 순종치 않을 때는 오히려 하나가 되어 보겠다는 목적에서 피 흘리는 전쟁이 역사적으로 벌어진 것이다. 왜냐 하면 언제나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어서 강자의 세력으로 하나가 되겠다는 것이 죄악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생을 찾아 오셔서 인생을 위하여 자기가 죽어서 하나가 되게 한다는 것이므로 이 사상만이 완전한 사랑이니 이 사랑의 역사로만이 세계 평화 통일의 하나를 이루는 승리가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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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1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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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영화(榮華)와 아버지의 영화(榮華) (요한복음 17:1∼7)


아들의 영화(榮華)와 아버지의 영화(榮華)
- 요한복음 17:1∼7 -

요한복음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榮華)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榮華)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榮華)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榮華)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榮華)롭게 하옵소서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영화(榮華)라는 것은 아들의 영화(榮華)와 아버지의 영화(榮華)가 무엇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기독 신자가 덮어놓고 영화(榮華)를 바라본다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의 영화(榮華)와 성부의 영화(榮華)를 바로 아는 데서 우리는 영화(榮華)롭게 될 수 있다.

1. 성자의 영화(榮華) (1∼2)

예수님께서 영화(榮華)롭게 된 일은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에게 온 일이다. 성자께서 영원히 성자의 신으로 있다는 것은 영화(榮華)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아담을 낼 때에 아담 자신이 영화(榮華)롭게 될 인격을 준 것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은 아들의 이름으로만이 영화(榮華)롭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 나신 일이 창조의 목적을 달성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인 것이다. 흙에서 난 몸이 흙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 영화(榮華)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소원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로 거룩한 물과 피가 마리아에게 임하여 그 몸이 인간에 탄생되었다는 것은 성자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완전한 몸이 없이는 영화(榮華)라는 것이 다 풀의 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의 신이 완전한 몸을 하나님께로 받았다는 것은 큰 영화(榮華)를 가져올 싹이 되었던 것이다.

둘째 : 그 몸이 대속의 제물이 된 일이다. 아무리 성자가 완전한 몸을 성령의 잉태로 받았다 하여도 그 몸을 가지고 홀로 있다는 것은 영화(榮華)가 될 수 없고 그 몸이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만이 천하 만민이 예수님의 몸과 같은 몸으로 가지게 된다는 것이 큰 열매가 되는 것이니 영화(榮華)가 되는 것이다.

셋째 : 통치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통치하려 해도 죄진 사람을 그냥 두고 통치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그 아들에게 맡긴 것이 만민에게 영생을 주는 일이 됨으로 영화(榮華)롭게 된 것이다.

2. 성부의 영화(榮華) (3∼7)

조물주 하나님은 영화(榮華)를 목적 두고 창조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신은 자기 홀로 있어서 아무런 영화(榮華)가 없으므로 대 자연을 창조하시고 자연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보다도 그것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서 그 사람을 통하여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조물이 된 사람은 자기 힘으로 도저히 자연을 바로 사용하는 인격을 갖지 못하므로 오히려 자연계를 지배하는 것보다도 자연계의 지배를 받고 오히려 그 물질 앞에 종이 된 인생이라는 것은 조물주를 영화(榮華)롭게 못하고 노엽게 하는 일이 된다. 이제 성부의 영화(榮華)는 무엇이냐는 것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행하는 자가 있으므로(3∼4)

이 땅에서 하나님이 하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없게 될 때에 이 세상은 죄의 세상, 사망의 구렁텅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아담, 하와가 하나님의 하라는 일을 다 하였던들 그야말로 얼마나 큰 영화(榮華)가 될 것인가!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榮華)롭게 하였다고 말씀한 것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없다면 하나님께는 아무런 영화(榮華)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그 영화(榮華)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榮華)보다는 하나님의 큰 슬픔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행하시는 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아버지 앞에 예배하고 하나님을 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은 큰 영화(榮華)가 되는 일이다. 첫째 아담이 순종치 않으므로 천하의 모든 사람이 질적 타락으로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에베소서 2:3). 그러나 둘째 아담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신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됨으로써 주고 싶은 사랑의 자체가 되신 하나님의 영화(榮華)가 되는 것이다. 의중에 큰 의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을 순종하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그리스도 한 분이 하라는 일을 함으로 하나님을 영화(榮華)롭게 한 것이다.

둘째 : 아들과 함께 영화(榮華)롭게 됨(5)

예를 든다면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있지 않으면 아버지 마음이 슬퍼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은 아들과 함께 영화(榮華)롭게 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아들이 영화(榮華)롭게 될 때에 아버지는 그것을 자기 영화(榮華)로 생각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는 것이다(요한복음 14:13∼14). 인간이 행함으로 되는 것 보다 도 아들의 이름으로 응답이 와서 이루어지는 일을 하나님은 영광스럽게 아는 것을 우리 인생은 알고 겸손히 그 뜻에 순종 하는 것 뿐이다.

결 론

영화(榮華)라는 것은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고 성부, 성자의 영화(榮華) 아래서 우리는 같이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 우리의 영화(榮華)라는 것이다. 왜냐 하면 성부, 성자의 활동은 죄를 지은 인생들이 성부, 성자의 영화(榮華) 아래 들어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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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가정의 종교 싸움 (창세기 4:1∼12)


아담의 가정의 종교 싸움
- 창세기 4:1∼12 -

창세기 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종교라는 것은 질적 타락을 가진 사람에게 영혼 구원을 목적한 것이 종교의 시발점이었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질적 타락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고 사람이 질적으로 타락이 될 때에 피로써 대속의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면 도저히 그 영혼까지도 다 사망에 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가정에 종교 싸움이 시작된 것이 금일까지 계속되는 싸움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종교 싸움이라는 것은 왜 있느냐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말한다.

1. 응답이 있고 없는 데서 싸움이 있음 (1∼5)

종교라는 것은 그 제사가 상달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데 의하여 합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좌우된다. 아무리 한 아담의 몸에서 난 가인 아벨이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응답이 있을 때에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왜냐 하면 예를 들 적에 한 가정에 두 아이가 있는데 한 아이에게는 맛있는 빵을 주고 한 아이에게는 주지 않는다면 받은 아이는 기뻐하고 받지 못한 아이는 성이 날 것이다. 그러면 부모가 빵을 주는 것도 아무 아이에게나 줄 수 있다. 속담에 미운 녀석 빵 조각 더 주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진리의 하나님은 아무리 사랑하는 아담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을 적에 용서 없이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었거든 하물며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는 것이니 중심에 간절한 마음이 없는 사람의 제사는 받을 수 없을 것이고 간절한 사람의 제사만 받는 것은 합법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가인의 제사는 왜 받지 않았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 선을 행치 않는 죄이다(6∼7 상반절). 하나님은 그 제물을 보는 것보다도 중심에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을 단 마음으로 순종하느냐, 않느냐는 것을 보시는 것이니 하나님의 일을 단 마음으로 순종치를 않는 것이 큰 죄이므로 선을 행치 않는 가인의 영적 상태를 볼 때에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심중은 간절하나 실수가 있는 사람보다도 제사는 드리면서도 그 중심이 간절한 것이 없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 죄의 어미가 되는 일이다(7 하반절).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였다. 죄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자기가 고의적으로 지은 죄가 아니고 상대편에 끌려서 실수한 것은 죄의 어미가 되는 행동이 아니로되 옳은 사람을 이유 없이 미워하는 것은 죄의 어미가 되는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 자체는 그 마음을 정욕의 사단이 점령했기 때문에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니 상대편이 내게 감정을 주므로 끌렸다는 것과 상대편이 내게 옳게 대해 주는데 해코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벌써 그 속에 마귀의 역사가 주인이 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언제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남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기 부족을 깨닫는 마음으로 제사를 하면 받으실 것이로되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남을 미워하는 제사는 도저히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셋째 : 하나님의 대적이 된 일이다(8∼9). 대적이라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는 것도 내 대적이요, 직접 나를 대적하는 것도 내 대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았는데 가인은 아벨을 죽였으니 하나님의 대적이요, 하나님을 대하여 반항심을 가진 것이니 즉 하나님이 기뻐하는 아벨을 죽인 일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했던 것이다.

종교 악이라는 것은 3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외식하는 일이요, 둘째는 시기하는 일이요, 셋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평을 두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종교를 믿어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2. 억울한 피와 보응 (10∼12)

억울한 피가 이 땅을 적신 일은 대부분이 종교 싸움에서 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담의 집에서 시작된 피의 호소가 이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피 값은 새 시대가 이룰 때에야 갚아준다고 계시록 16:6, 17:6, 6:9∼10에 말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마귀의 도구가 되었고, 제사의 응답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억울하게 마귀의 도구가 되는 사람에게 피해를 당했다는 것이 이날까지 종교적인 싸움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 싸움은 이제 끝을 맺는 단계에 들어온 것이 우리 앞에 남은 전쟁이라는 것이다.

아담은 미약하므로 남에게 끌려 범죄했으니 그의 제사는 받았지만, 가인은 남에게 끌려서가 아니고, 짐짓 하나님의 사람을 미워하고 죽인 죄이므로 하나님의 대적이니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고 저주를 받아 영원히 멸망의 자식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금일도 종교의 싸움이 진리를 위하여 피해를 당한 자는 다시 살아서 왕권을 받을 것이고, 피해를 주던 자는 영원히 멸망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아벨이 형에게 죽은 것은 선악과를 먹은 죄 값에 죽은 것이 아니고 의로운 제사를 위하여 죽었으므로 그는 죽었더라도 왕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의로운 사람을 마귀의 도구가 되는 거짓 종교인에게 죽게 한 것은 피 값을 갚는 날에 왕권을 주기 위한 방법이라고 본다.

결 론

하나님은 마귀를 들어서 쓸 적에 아담, 하와는 직접 뱀으로 꾀어 보았지만, 가인 때부터 지금까지는 종교인으로서 의로운 제사를 못 드리는 자는 다 영적으로 마귀의 정복을 당해서 뱀의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내려와서 끝을 맺는 것이니 계시록 13:11 이하를 보면 거짓 선지가 참된 성도를 해치는 정책을 쓰는 것이 마지막 환란인 것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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